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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SF, 판타지

둠스데이북

by bravoey 2018. 8. 23.

세번째 집어든 SF소설.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아작출판사 직원분이 권해준 순서대로 읽어보는데 이 책도 재밌다며 초급 몇 권 보시고 함 보셔라 했는데 마침 작은도서관에 이 책이 떡하니 들어와 있었다. 코니 윌리스 작품은 처음이기도 하다.

키브린이라는 역사학도가 시간을 건너 중세로 가게 되고, 옥스퍼드 근처 한 마음에서 페스트가 덮쳐 마을사람들을 구하려고 애쓰다가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다. 재미는 있었지만 기본 줄거리에 비해 책이 너무 길다. 특히 1권 중반부터는 이걸 읽어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여서 줄거리와 큰 연관이 없어보이는 몇 장씩은 넘겨서 봤다. 전반적인 줄거리 이해를 위해 필요하기에 작가가 썼겠지만 아직 초급수준인 나에게는 지루하다. 2권 중반부터가 진짜 재미있어 놓지 않고 읽은 듯.

책 전면에는 여자라 시간여행이 안된냐는 식의 질문이 써있긴하나, 키브린이 여성이어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내용은 아니다. 시간여행에 충분하도록 던워디 교수가 애써주시고, 키브린은 약간 벗어나긴 했지만 충분히 독립적이고 유능한 여성이어서 중세에서도 잘 살아남아 오히려 페스트에 대항해 사람들을 구하는 헌신적인 역할을 해낸다. 결국 페스트를 모두 피해가지는 못해 중세 벗들의 죽음을 모두 본 후에야 본인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중세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키브린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페스트로 쓰러지는 가족들, 자녀들을 보며 중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신을 의지하는 것 뿐이었다. 키브린은 질병이라고 외치지만, 그들은 사람들의 죄로 인해 신의 벌을 받는 것이고 곧 종말이라며 두려움에 떨 뿐이었다. 키브린을 믿는 것은, 그녀를 하늘에서 떨어진 캐서린 성녀라고 믿는 신부 뿐이었다. 중세에서 만난 엘로이즈와 그녀의 두 딸을 믿고 의지하는 키브린은 그들이 살기를 간절히 바라며 보살폈지만 갑자기 툭툭 스러지는 생명 앞에서 그녀조차 신은 어디있냐며 울부짖을 뿐이었다. 최후로 그녀가 의지하던 신부마저 죽자, 마침 던워디 교수가 그녀를 구출하러 오긴 하지만 패기있는 역사학도인 그녀의 모습은 죽음의 절망앞에 무력감을 느끼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살벌한 죽음 앞에서 이성과 합리는 너무 먼 것이었다. 이성적일 수가 없었을 듯 하다. 마을 전체가 죽음이어서 길가에 시체가 널브러진 그 곳은 지옥이었을테니까. 메이린 여사의 말처럼 "하느님이 계시다면 혼 좀 나셔야 할"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사람이 어떻게 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신을 믿고 의지하겠다고 고백하기엔 너무 나약하다. 중세의 이 비극을 보며 나는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겠다는 조폭같은 기도보다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제발 잊지 않고 하나님을 잠시 믿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중에는 꼭 다시 돌아가도록, 나를 좀 단단히 잡아달라고 기도하고 싶었다. 

작가가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정할 수 없음에도, 나는 대학에서 너무 제한적인 시각으로 소설을 바라보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 우아한 뻥쟁이의 멋내기 라고 한다면 SF는 미친 이야기꾼의 초대장이다. 막 말도 안되는 걸 말이 되는 것처럼 자기 세계를 만들어놓고 일단 와보셔, 하는 시장호객꾼 같은 자신감. 자기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하는 소설의 장치들을 좀 더 읽어보며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꾸 이 장르에 손을 뻗는다.

길지만 그래도 코니 윌리스의 저력을 느껴본 소설. 다른 것도 읽어봐야 하는데 어느 순간 손에 조지 R.R. 마틴 걸작선이.... 크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