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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터키

터키여행기② - 카르스, 폐허의 외로움

by bravoey 2010. 1. 14.

 



꿈을 꾸고 있는 줄 알았다. 카르스로 가는 버스에서 맞이한 새벽, 잠시 눈을 떠서 창 밖을 봤는데 보랏빛 공기가 너른 호반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탁트인 초원이 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고, 거대한 녹색의 숨소리가 대지를 감싸고 있었다. 터키의 평야는 정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그 평야를 뒤덮고 있는 꽃밭은 보는 이의 가슴에도 대지의 기운을 안겨준다. 카르스는 시작부터 놀라움이었다.

이와 더불어 놀라웠던 사실은 카르스라는 시골마을에서는 나의 짧은 영어조차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숙소를 찾기 위해 길을 물으면 다들 터키말로 대답해주었다. 이 날부터 손짓, 발짓이 난무(?)하는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여행 중반에는 나는 한국말로, 상대방은 터키말로 대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카르스에는 유령도시라고 불리우는 아니유적지가 있다. 아니는 고대부터 아르메니아의 성곽도시로 존재했었고, 비잔틴과 아랍세계의 완충역할을 담당하던 아르메니아의 영토였다. 후에 몽고의 침입과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지금은 버려진 도시로 남겨져 있다. 당시에 세워졌던 술탄의 궁정과 교회, 대성당 등은 세월의 상처를 고스란히 받은 채 남아있다. 그래도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아니대성당이었다. 부분적으로 허물어진 돔과 지붕을 두 개씩 쌍을 이룬 기둥위에 놓인 아치 네 개가 받치고 있다. 중앙 돔은 무너져 있었다. 성 그레고리오 교회도 외관은 그래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예수와 최후의 만찬 그림이, 돔에는 승천 장면과 선지자들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지금 생각해도 아니유적지는 다녀본 곳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다. 한쪽은 러시아 국경, 한쪽은 아르메니아 국경, 단절된 나라들 사이의 공간이라는 점, 거의 파괴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예배당과 탑들에서 느껴지는 폐허의 이미지, 6월의 뜨거운 햇빛과 바람의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하거 광활한 평야였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든 관광지를 손꼽을 때는 그 나라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터키에서도 수도 앙카라보다 이스탄불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가장 융성한 시기의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에서 만난 폐허는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사람의 삶에는 지난 시간이 남기고간 상처와 현재를 지나는 외로움과 대면하는 과정이 반드시 겪게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는 바로 그런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아마 살면서 그런 순간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아니의 폐허에 걸터앉아 그 순간을 바라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