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의 일과 여가 - 정수복(사회운동연구소장)

: 환경과 생명에 실렸던 글입니다!

일과 여가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준 글!
비가 내린 날부터 우울하기 짝이 없다.
기분도 착 가라앉고, 짜증도 계속 나고.
봄이라 변덕부리는 걸까?
별 것 아닌 말에도 맘상하고, 기분 잡치고.

어서 이 시기를 벗어났으면!

글을 써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서 글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요즘 부쩍 글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매일 두세 개씩 써야 하는 기사도 부담스럽지만 내 생각을 담아내야 하는 글의 경우에는 쓰기가 더 힘들다. 내용을 채우는 것도 쉽지 않고 대개는 사정이 그러다보면 문장까지 꼬이기 십상이다. 말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풍부하면 글도 쉽게 써지는 반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호한 데다 쓸 거리까지 빈곤하다보면 내가 봐도 참 한심한 허리멍텅한 글이 된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고 해서 또 채울 내용이 풍부하다고 해서 바로 훌륭한 글이 나오는 게 아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인데도 도무지 글은 해독 불가능한 경우가 꽤 많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사실 내용이 빈곤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부럽게도) 말이나 잡념을 글로 옮기면 그럴 듯한 글이 되는 사람도 많다. 글 재주는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일까?

(한번 예를 들어 볼까.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혹은 있었던) 지식인 심 아무개와 윤 아무개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둘다 한 때 알튀세르에 강하게 경도됐다는 특징이 있다. 나 역시 수년간 이들의 심오한 사고를 이해해 보려고 부단히 애를 쓴 적이 있었지만 항상 난해한 문장 때문에 좌절하곤 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최근 꽤 많이 읽히는 소설을 쓴 박 아무개와 정 아무개를 들고 싶다. 이 둘도 공통점이 있다. 평단의 꽤 호의적인 평가를 등에 엎은 데 이어, 기이하게도 보통 평단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20~30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 이제 소설이 꽤 이름이 알려진 덕에 여러 일간지에서도 이들의 칼럼을 볼 수 있다. 글쎄, 그 시간에 책이나 더 읽는 게 두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낫지 않을까? 하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책 읽지 않는 20~30대들과 교감하는 데는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고백하자면 나 역시 10대 때부터 글쓰기에 어느 정도 컴플렉스가 있었다. 특히 대학에 들어와서 글 잘 쓰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더욱더 글쓰기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었던 것 같다. 용을 쓰면서 따라가보려해도 누구에게나 쉽게 읽힐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의 글을 빚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글을 팔아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혹시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아마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평범하고 글 재주가 없는 녀석도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글 재주가 있는 이들이여 좌절하지 말라.'

그런데 최근 우연찮게 많은 팬들을 끌고 다니는 '인터넷' 글쓰기의 달인 두 사람에게서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들었다. 한 사람은 김규항이다. 최근 김규항은 그의 블로그에 「문장론」이라는 글을 통해 나름의 글쓰기 철학을 밝혔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

인용한 부분을 읽고 나서 낯이 뜨겁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 끄적이는 이 글조차도 김규항의 기준에서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글인가. 김규항과 같은 타고난 글쟁이도 서너 번 퇴고를 한다는데 솔직히 나는 (빠른 시간 안에 글을 써내야 하는 직업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

다른 한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의 고백은 좀 우연찮은 기회로 들었다. 어제 <프레시안> 일로 그와 잠시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대화가 오가다 나온 그의 고백.

"내가 요즘 방송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방송을 위해서 짧은 칼럼이긴 하지만 1주일에 글을 여섯 개나 쓰고 있어요. 거기에 덧붙여 《씨네21》 글까지 써야 하니, 하주 힘들어요. 도무지 글감이 떨어져서 글쓰기가 힘들어요. 갈수록 글의 질도 떨어지는 것 같고."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고백은 글쓰기에 대한 상식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듯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생각을 벼르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문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여기에 잘 읽히는 글이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이다. 김규항은 이 역시 잘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요즘 내가 글쓰기가 더욱더 힘들어지는 것은 또 글쟁이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글쓰기에 자신감을 상실하는 것은 바로 글 재주에 비례해서 현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내가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내 삶을 다듬는 일과 같다."

by tyio | 2005-08-20 23:25

우 상

그날 오후 3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아래위로 찢어졌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게 된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기거하는 집’이라 여겨졌다. 모든 인간은 제사장을 통해서만, 성전이 정한 제물과 절차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독점한 성전의 지배층은 엄청난 영화를 누렸다. 성전이 정한 제물과 절차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죄인이었다.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과 결탁한 장사꾼들을 불같은 분노로 내쫓은 예수는, 성전의 휘황함을 찬탄하는 제자에게 말한다. “돌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오늘 교회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전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되새기는 것이다.


오늘 교회는 예수 앞의 성전처럼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독점한 채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좇는다. 그렇다면 그 교회들은 “벽돌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십자가가 솟은 건물에 강대상이 있고 성가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그곳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기는 건 그저 우상숭배다.

교회에는 하느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엔 하느님이 있다. 그러나 교회에 하느님이 있는 건 하느님이 세상의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교회에선 목회자를 사역자, 주의 사자, 주의 종이라 부르며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대리하는 사람, 혹은 여느 인간보다 하느님과 좀 더 가까운 인간처럼 여기곤(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목회자는 성직이 아니라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 노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목회자나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도 목회자를 뭔가 성스럽고 특별한 인간으로 여기거나(주장하거나), 괜스레 어려워하는 건 역시 우상숭배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그런 우상숭배가 횡행하는 건 교회의 영업이익을 차지하려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예수 당시의 성전이 그랬듯이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은 우상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교회에 갇혀 있지도 목회자를 통해 있지도 않다.


하느님은 그를 찾는 모든 곳에, 그를 찾는 모든 사람 앞에 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만여 명(남자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야기다.


밀리언즈라는 영화에 보면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주인공 꼬마에게 나타나 이 에피소드의 진실을 알려준다. 실은 다들 도시락을 준비해서 그걸 먹었지만 예수의 위신을 생각해서 숨긴 것이라는. 그런 식의, 예수도 씩 웃을 만한 익살이야 문제될 게 없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 에피소드의 과학성을 두고 자못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혹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든 기적 에피소드들)은 예수의 마술 능력이나 과학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허기진 만여 명의 군중들, 하릴없이 며칠 째 예수를 따라다니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번듯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러고 다닐 수 있었을까. 그들은 대개 사람 취급 못받는 사람들,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뿌리 뽑힌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죄인들, 아이들, 여자들인 그들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제 삶에 빛을 던져 준 한 예언자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들은 몹시 배가 고프지만 음식은 터무니없이 적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각자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감사의 기도를 한 뒤 말한다.


“함께 먹자.”


그리고 그들은 배불리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솟아나는 마술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만여 명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눈곱만큼씩 뜯어 나누어먹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런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아무리 적은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눌 때 풍요로웠다는 것이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평화롭게 나누어 먹는 것, 바로 그게 기적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음식 쓰레기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살 좀 빼야 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떼어주는 것인가?

도심의 휘황한 빌딩 한편에 우아하게 할당된 매우 아름다운 가게가 나눔인가?

아니다. 나눔은 자선이나 적선이 아니다. 나눔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불쌍한 인간으로, 하류 인간으로 만드는 행위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나눔은 ‘내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하는 드라마다.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사적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지구의 것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 되는 것, 그게 나눔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는 바로 그 나눔을, 하느님의 나라의 구성 원리를 가장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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