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휴가를 다녀오고 완전히 지쳐버렸다. 다래끼에 발목통증, 둘째를 껴안고 견뎌야 하는 여전한 더위. 

체력이 이제 예전 체력이 아니구나 싶다.


아, 진심으로 육아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부모로의 책임감, 의무 이런 것들이 다 내가 자초한 일이라 할 말은 없지만,

애들이야 이쁘니 뭐 할 말은 없지만,

아, 진심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왕관 쓴 덕에 어쩌다 여왕님이 된 개구리. 왕관을 쓴 순간, 권력을 향한 체계와 법칙이 순식간에 만들어지고 왕관은 이렇다 판단할 새도 없이 달콤한 권력의 자리로 안내한다. 결국 왕관이 벗겨지면 아무것도 아닐 그 것을 위해 개구리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누군가의 반지로 로맨틱하게 마무리된 동화책 끝자락에서 권력이란 그닥 길지도 달콤하지도 않음을 역설적으로 보게 된다.

폴님께서 번역하셨다기에 덥석 집어들었는데 다비드 칼리였다는. <누가 진짜 나일까> 보면서 감탄했는데 이 책은 아주 얕고 굵게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다. 왕관을 쓴 나, 왕관을 쓰지 않은 나 중 누가 더 행복할까 하는 생각부터 권력을 만드는 건 왕관일까 왕관을 둘러싼 다른 개구리들일까 까지. 실제로 여왕님을 모셔본 한국사회는 좀 더 와닿는 게 있지 않을까. 권력은 실제로 여왕에게 있지 않고, 권력을 만들 줄 아는 자들에게 실제 권력이 있었다는 것을 '박근혜'라는 인물을 통해 절감하지 않았나. 우리는 촛불을 들며 대통령 내려와라 했지만 이면에서 대통령 만든 너희 권력을 향해 외쳤을 것이고, 그 권력이 '지금은 물러설 때'라고 판단하게 하지 않았을까. 

왕관은 매력적이나 치명적이다. 누군가에게 왕관을 씌워 욕망을 채우려는 자들을 유의깊게 보아야 한다. 여러 이데올로기를 뒤집어쓰고, 여러 루트로 교묘하게 사람들을 조정하려고 하는 이 악랄한 사회에서 결국 살아남는 방법은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힘' 뿐이다.

동화책 하나 보고 엄청 진지했다는... 아 더워.


안톤 체홉의 그림책. 길 잃은 개 카시탄카가 서커스에 출연하는 한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 그 집에 가서 훈련받으며 다른 동물의 죽음을 겪기도 한다. 서커스 공연장에서 주인을 찾아 돌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카시탄카는 원래 살던 주인집에서 욕설과 괴롭힘을 당하지만 있던 그 자리를 그리워하며 새 주인이 주는 먹이와 새로운 친구들에게 적응해간다. 목수의 집에서 커오던 개라 나무냄새를 그리워하는 반면 새 주인이 주는 맛있는 먹이와 안락함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뭐든 좋은 일에는 대가가 있는지, 서커스 훈련을 하게 되고 훈련 중 거위인 이반이 죽는 것을 보게 된다. 자기 앞날의 암시라고 생각한 것일까, 원래 주인을 보자마자 부리나케 돌아가는 카시탄카를 보면 '괴로움은 반복될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돌아가 목수인 주인에게 욕 먹고 아들에게 괴롭힘 당하겠지만, 원래 있던 그 자리가 카시탄카에게는 가장 '익숙한' 자리이기에 '편한' 장소인 듯 하다. 사람도 그런 면이 있다. 새로운 것을 주저하고 익숙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 그 곳이 그닥 좋은 곳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주인과 새로운 공간 또한 적응해야 한다는 '괴로움'이 따르기에, 그것보다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어느 평에서는 카시탄카가 예전 주인을 그리워해 꿈꾸듯 그를 찾는다는 둥 써있는데, 내가 보기엔 카시탄카의 행위에 너무 의미를 두려했던 것 같다. 오히려 작가는 익숙함 때문에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어떤 현상을 지적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것을 향하는 괴로움, 그에 대한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의 어떤 습성을 꼬집는.

날카롭게 꼬집힌 느낌 덕분에 다시 열어보거나 소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세상이 실제로 이렇지 않아?'하는 작가의 물음이 씁쓸하게 동의된다. 크흑.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날마다 새롭고 괴로울 뿐.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이라는 조건에서 비롯하는 슬픔과 기쁨을 고루 나누는 것.
그래 봐야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 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 주는것--- 그것이 '죽음'이다.

- 최인훈, 광장 중에서

당신이 풀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떠들던 그 일이 아니었을 것.
걸어온 길, 앞으로 가야만 하는 길, 만들어 가고 싶던 세상, 동지들. 그 일들이 아마 절절하게 눈 앞을 채웠을 것.
이제 그 일은 사랑하는 동지들, 죽음 앞에서도 걱정하고 그리워한 그 동지들이 해낼 것.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같은 날 세상에 인사한 최인훈 선생께서
중립국으로,
평화와 현실의 환상 따위 없는 평안 넘치는
그 중립국 가는 길목에서
한마디 위로 건네주시길 바라며...

갑자기 들깨칼국수가 생각난 건, 아주 더운 여름 날이었다. 

뜨거운 햇살이 온 몸을 녹여버릴 듯 내리쬐는데 발 끝으로 살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 때 왠지 들깨칼국수 한 그릇이 생각났다. 이상하게, 덥고 짜증나는데 그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힘이 솟는 듯 했다.

소울푸드. 모든 음식이 다 맛있지만 그 중에도 이상하게 '영혼을 따뜻하게 해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음식'이 있다. 

그것은 배고픔이나 스트레스로 폭식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다. 알뜰한 마음으로 식당에 앉아 기다리는 순간이 참 좋은, 나오는 그 모습만 봐도 뭔가 완성된 듯한 식사. 한 입 떠서 목구멍으로 따뜻한 것이 흐르면, 양수 안에 있는 태아의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싶게 아주 적당한 그런 맛이다. 

나의 소울푸드는 들깨칼국수. 쫄깃한 면발과 뜨끈하고 고소한 향이면 충분하다. 부담없이 후루룩 먹으며 수다도 떨고, 김치 맛을 더 빛나게 해 준다. 무엇보다 속을 뜨겁게 해서 허해진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심지어 이 들깨칼국수와 관련한 추억도 없다. 그냥 이건 들깨칼국수와 나의 만남이다. 늘 첫만남. 어디나 맛있다. 어디를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떠오르는 것도 없기에 더 담백하다. 깔끔하고 좋다.

연결된 것이 너무 많고, 떠오르는 것도 너무 많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알고 싶지 않지만 보게 되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삶은 피곤하고 더 나태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 들깨칼국수 한 그릇. 모든 것을 차단하고 오롯이 너에게만 집중하며 연결된 것을 잊고 시간의 흐름을 뜨뜻한 국물에 맡기는.

그런 소울푸드, 들깨칼국수.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