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사단이라는 명칭을 쓰는 종류의 사람은 목사님을 모욕한 사람이나 인륜에 어긋나는 나쁜 일을 한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사람이 판단하기에 나쁜 사람은 당연히 사단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뭐, 그 말에 다 동조할 수는 없었다.
가까운 이들 중에는 내가 판단하기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하는 목사를 '존경'하는 이도 있었고, 어떤 목사든 목사를 비난하는 것은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사, 라고 호칭을 했다가 한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이 시대는 사람의 생각이 주인인 시대인 것 같다. 하나님의 일과 사단의 일을 판단하는 기준은 철저히 사람 그것도 자기 중심이다. 자기에게 좋으면 하나님의 일, 나쁘면 사단의 일이 되어버린다. 사단까지 가지 않으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자기 죄 때문에 용서를 빌면 일이 잘 될거라고 믿는 마음까지도 다 자기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도 그렇고 베드로도 그렇다. 스데반 집사도, 바울도, 요한도 누구하나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다운 삶을 살다가지 못했다.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고, 머리가 잘리고, 대중에게 매를 맞고, 장가도 못가고, 유배당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았다. 그것이 바로 축복이었다.
아브라함이 몇 천평의 땅을 얻고, 야곱이 부자로 살고, 요셉이 국무총리로 산 것도 축복이지만 저들도 축복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 모두가 낮고 높음이 없이 모두, 축복이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만한 믿음 하나가 축복이었던 것이다.

김규항 님의 '사단'이라는 글을 보고, 비수같다고 생각했는데 적잖은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묵상이라는 글이 다시 올라온 것을 보니 다시 한 번 공감이 되어 올린다.

부디 우리의 삶에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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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용균 2008.02.13 13:42 신고

    예수의 길. 그 길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를 따르면서도 베드로처럼 자기 생각 속에 빠져 여전히 행동하고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다는 것이 실상은 자신의 욕심이나 보신을 위한 것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참 세상은 점점 나를 힘들게 하고...


'당선공약 10억' 엄신형 목사 당선 
한기총 대표회장 선거서 김동권 목사 제쳐...'10억 효과' 논란일 듯

뉴스엔조이 기사보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59)


교회는 물질이라는 우상을 깊이 새기고, 세상보다 더 지독하게 존재하고 있다.
더 깊게 기도해야 한다.
내 가족보다, 내 주변 사람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전해야 할 교회가 제대로 서도록
더 깊게 기도해야 한다.

  1. 이은숙 2008.01.04 10:45 신고

    응~ 올해 간사를 또 한다고 지금 어머니가 난리신대...결국 돈문제 더라구ㅠ

  2. Favicon of http://bravoey.tistory.com BlogIcon bravoey 2008.01.04 13:34 신고

    오, 쭉 가는거야? 좋아~^^ 어머니도 곧 포기하시겠지 뭐!
    낙관적으로 가는거야~

"청와대에 찬송과 기도 소리가…" 뉴라이트기독교연합의 '이명박 후보 당선을 위한 기도회' 유감

2007년 12월 10일 (월) 22:52:47 김동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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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란 고백이다. 내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도 버거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매일매일 고백하는 것이다. 잠잠히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나님 앞에서의 진지한 성찰이다.

기도회는 쇼가 아니다. 차라리 반상회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이 모여 서로의 삶에 대해 성찰하고 바른 길로, 바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아가는 반상회와 같다.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대통령이 예수 믿는 자가 되든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되든지에 상관없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자기 사람을 참모로 세워야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웃기지 않은가.

3.

한심하다. 차라리 이명박 후보의 캠프로 들어가 일을 해라. 자기 욕망에 하나님을 끌어오지 말아라. 이 세상에서, 제대로 예수 믿고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라.
결국 한국교회의 부패와 오류를 아파하는 사람은 그들이니까.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지난 주에, 지리산을 다녀와서 곤한 몸에 몸을 반짝 띄워준 찬송, 515장.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예수의 십자가를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늘 절감하며 산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은 정신을 못차리게 여러가지로 나를 괴롭히는데
그 속에서 제대로 서 있기도 참 힘든 것 같다.

제대로 사는 것,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사는 것.
매일 한숨만 나지만, 그래도 빨딱 일어나서 차렷하고 자세를 정비해야지.
내일도 차렷!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만여 명(남자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이야기다.


밀리언즈라는 영화에 보면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주인공 꼬마에게 나타나 이 에피소드의 진실을 알려준다. 실은 다들 도시락을 준비해서 그걸 먹었지만 예수의 위신을 생각해서 숨긴 것이라는. 그런 식의, 예수도 씩 웃을 만한 익살이야 문제될 게 없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 에피소드의 과학성을 두고 자못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혹은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모든 기적 에피소드들)은 예수의 마술 능력이나 과학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허기진 만여 명의 군중들, 하릴없이 며칠 째 예수를 따라다니는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번듯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러고 다닐 수 있었을까. 그들은 대개 사람 취급 못받는 사람들,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뿌리 뽑힌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죄인들, 아이들, 여자들인 그들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나 제 삶에 빛을 던져 준 한 예언자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들은 몹시 배가 고프지만 음식은 터무니없이 적다. 제자들은 예수에게 각자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감사의 기도를 한 뒤 말한다.


“함께 먹자.”


그리고 그들은 배불리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음식이 솟아나는 마술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만여 명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눈곱만큼씩 뜯어 나누어먹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런 과학적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건 아무리 적은 것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눌 때 풍요로웠다는 것이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평화롭게 나누어 먹는 것, 바로 그게 기적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음식 쓰레기를 서로 맡지 않으려고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이,

“살 좀 빼야 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불쌍한 사람들에게 떼어주는 것인가?

도심의 휘황한 빌딩 한편에 우아하게 할당된 매우 아름다운 가게가 나눔인가?

아니다. 나눔은 자선이나 적선이 아니다. 나눔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불쌍한 인간으로, 하류 인간으로 만드는 행위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이다.


나눔은 ‘내 것’을 ‘우리 것’으로 전환하는 드라마다.


자연도 자원도 돈도 식량도 집도 땅도 사적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것이며 지구의 것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 되는 것, 그게 나눔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예수는 바로 그 나눔을, 하느님의 나라의 구성 원리를 가장 서정적인 광경으로 보여준다.

2004.12.12 Sun


당연한 말이지만,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선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건 예수를 종교적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와 무관하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떠받드는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선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고 나서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있는 것이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인지조차 모르면서 무작정 예수를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라 떠받는 건 우스꽝스런 일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가 없다면 ‘신의 아들’ 예수도 없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가장 유력한 자료는 역시 신약성서의 맨 앞에 실린 네 개의 복음서들(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다. 그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 셋을 ‘비슷한 관점’에서 씌어졌다고 해서 ‘공관(共觀)복음’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훨씬 더 종교적으로 채색된 것이다. 공관복음 가운데 가장 일찍 씌어진 건 마가복음이다. 마가복음은 70년경에 씌어졌다. 마태와 누가복음은 마가복음보다 늦게, 마가복음을 기본 자료로 씌어진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공관’을 갖게 된 것도 마가복음이 먼저 씌어지고 나머지 둘이 그것을 기본 자료로 해서 씌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같은 관점을 가진 복음서가 세 개나 존재하는 걸까? 그것은 복음서가 씌어진 목적 때문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는 것보다는 그것을 쓴 작가가 소속된 교회공동체의 ‘신앙 고백’의 차원에서 씌어졌다. 각각의 교회공동체들은 저마다 조금씩 처지와 사명이 달랐고 그에 걸맞게 신앙관도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같은 관점이지만 조금씩 다른’ 자신들의 복음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복음서의 그런 성격을 둘러싸고 신학자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논쟁이 있어왔다. 아예 복음서를 통해 ‘예수의 생애’를 파악하려는 게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가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려고 씌어진 게 아니라고 해서 곧 그 내용이 전적으로 역사적 허구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복음서는 예수에 대한 각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의 생애를 근거로 한다. 복음서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증언하는 가장 진솔한 기록인 것이다.

복음서, 특히 공관복음서의 배경이나 맥락을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2천 년 전 집도 절도 없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랑하다 초라하게 죽어간 한 사내의 모습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자무오설’이니 ‘축자영감설’이니 해서 성서에 씌어진 한자 한자 그대로가 하느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니 사람이 그것을 분석하려 드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얼핏 경건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주장은 실은 ‘하느님의 영감’을 ‘인간의 영감’으로 재단하려는 태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한낱 사적인 대화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상대의 말과 그 말이 갖는 배경이나 맥락을 동시에 들으려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의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성서처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가장 최근에 씌어진 부분이 2천여 년 전에 씌어진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만 읽는다는 건 그 안에 담긴 뜻을 읽지 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의힘 기관지, 계속)
2004.11.29 Mon

예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잘못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누구나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건 무엇보다 예수와 (예수를 창시자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의 거리에서 나온다. 사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한 적은 없다. 그가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하느님의 뜻’을 놓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그 때문에 죽임까지 당했지만, 바로 그 점에서 보듯 그의 활동은 ‘유대교 갱신운동’의 하나였다. 그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 한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종교를 허물어 다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뜻이 무엇이었든 그가 죽은 후 그를 창시자로 하는 종교인 기독교가 생겼다. 처음에 기독교는 예수가 그랬듯 하층계급 인민들을 위한 종교였고 그런 계급성에 걸맞게 가혹한 탄압도 받았지만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그 정체성을 잃어갔다. 기독교는 예수를 처형했던 로마의 국교가 되고부터 지배계급의 종교가 되어 세계를 점령해갔다. 점령은 예수가 죽은 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보듯, 인류가 겪는 가장 악랄한 사건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다.

한국에서 사정도 그리 나을 게 없다. 근래 몇몇 대형교회의 불거진 행태가 말썽을 빚고 있지만 그런 경향은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신앙관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한국엔 교회가 많다. 밤이면 온 세상이 붉은 네온 십자가들로 넘쳐 난다. 한국에 이렇게 교회가 많아진 건 박정희 군사 파시즘 이후의 일이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군사 파시즘의 홍위병이자 가장 충직한 선교사였으며 인민들의 사회의식을 배설하는 공간이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신앙관은 “하면 된다” 라는 군사 파시즘의 구호에 봉사했다. 한국 교회의 철저한 빨갱이 콤플렉스는 군사 파시즘의 존립 기반이던 반공주의에 봉사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인민들(특히 파시즘과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이중적 억압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른바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결국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고 그 저급한 신앙관은 다시 가장 반동적인 사회의식으로 작동한다. 오늘 한국 인민들의 반동적인 사회의식을 생산하는 가장 결정적인 도구는 ‘수구신문’이 아니라 교회다. 오늘 한국에서 교회 문제는 더 이상 ‘종교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진지한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에게 교회문제는 ‘운동과 별개의, 교회에 안 나가는 자식을 염려하는 어머니와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문제는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단지 ‘교회문제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런 비판은 결국 교회 체제의 내부에 기생하게 마련이다. 해결은 “성전을 허물고 다시 짓겠다”던 예수의 선언처럼 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건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 질문만이 오늘 대개의 한국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것, 교회를 빙자한 상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노동자의 힘 기관지 연재. 이 글은 예수전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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