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씨의 예수전 강의가 대전에서 열려 어제부터 듣게 되었다.  김규항씨의 여러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예수전>이라 나름 떨리는 마음으로 그 분(?)을 알현했다. (나를 알아봐주셔서 감동이었다!)
첫 날이라 수강생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김규항씨가 예수전을 통해 제시했던 물음,
우리 사회의 바리새인은 누구인가와 "우리 안의 이명박"에 대한 이야기를 던졌다.
예수가 욕하던 바리새인은 "체제의 안정을 꾀하며 변화를 가로막던 이들"이라며
우리의 현재는 어떤지, 우리 안에 변화는 무엇인지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하루에 15분씩 기도하라는 말을 - 여기서 기도는 '변혁적인 기도'로서 나와 남이 분리되는 경쟁이 아닌 모두가 하나인 존재로 따스하고 평화로운 우리로 살아가야 함을 함께 다짐하고 바라자는 내용 - 목사님처럼 남겼다.

기대된다! 10년차 활동가인 나에게 던져진 '자기성찰'이라는 과제에 영양공급하라고
이 시간, 이 때에 김규항씨를 만나게 된 것 아닐까 하며!^^
  1. 2012.03.23 10:17 신고

    와 김규항!!!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사나운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없이 온유한 얼굴로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들은 조용히 말한다.
‘세상이 바뀌려면 사회구조도 바뀌고 나도 바뀌어야 한다. 둘은 본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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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이상의 것’을 ‘~이 아닌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앙은 ‘이성적인 것 이상의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성적인 것이 아닌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의 이성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사람들
(현실적 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과
그 이상의 부분만 강조하는 사람들(영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은
반목하고 갈등한다.
물론 신앙은 그 둘을 합친 것이다.

현실적인 이상이라는 말이 과연 말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의 잣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일들은
신앙이라는 범주에서 충분히 많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의 영성과 현실에는 너무나 많은 물질주의적 의식들이 이미 녹아있고
때로는 그것을 우리의 노력에 상응하는 당연한 댓가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노력은 현실 너머의 온전한 것일까?

바리새인의 기준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산다는 것.
끊임없이 자신을 깨닫고, 반성하지 않으면
내가 처한 현실과 현재의 나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바보가 될 것 이다.
바보인채로 하나님의 나라를 떠드는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닐까.

삶이 두려운 건, 바로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일 것이다.

(추석 연휴 끝 무렵 전주에서 혼자 올라오며 다빈치코드를 봤다. 하도 물어오는 사람이 많았던 작품이라 뒤늦게 몇 자 적어본다.)

다빈치코드를 둘러싼 기독교와 반기독교 세력의 심각하고 요란한 싸움의 핵심은 사움의 내용이 아니라 싸움 자체에 있다. 문제는 ‘예수가 마리아와 아이를 낳았는가’가 아니라 ‘예수가 마리아와 아이를 낳았는가를 예수의 신성을 가르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싸움은 이미 예수의 어머니에게서 시작되었다.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숫처녀)다. 물론 오늘 성숙한 사람들에게 마리아의 처녀성 여부는 예수에 대한 존경이나 신앙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설사 ‘성노동자’였다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개인’이라는 개념이 없고 성(은 불결하며)과 여성(은 인간이 아닌)에 대한 사고방식이 전혀 달랐던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마리아의 처녀성은 자못 심각한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이 자신들과 같은 방법(삽입성교!)로 태어났다는 걸 인정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은 소망을 순진하게 드러낸 것이다. 마치 “우리 선생님은 절대 똥을 누지 않아”라고 우기는 아이처럼 말이다. 그 아이를 붙들고 ‘왜 거짓말을 하는 거냐’라고 따진다면 얼마나 우스운가. 그런데 다빈치코드를 둘러싼 싸움은 바로 그 선생이 똥을 누는가를 근거로 그 선생의 가치를 가르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개똥같은 싸움인가.

Posted by gyuhang at 10:24AM |
영성

영성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듯, 영성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영어 단상

집 근처 언덕배기에 뚝딱뚝딱 무슨 놀이공원이나 영화 세트장 같은 걸 짓는가보다 했더니 그게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란다. 평일에도 노상 주차장이 빈 곳이 없고 주말엔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집과 사거리를 두고 떨어졌기 망정이지 조금만 가까웠다면 꼼짝없이 관광지 원주민 꼴이 될 뻔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커다란 광고판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 영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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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ewellery.ivyro.net/tt BlogIcon 무늬 2006.06.14 15:29 신고

    저도 영어에 목숨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어를 잘 하고 싶은 마음만은 아주 많은 편입니다. 아이들에 대해서는 아직은 저학년이어서인지 나중에 고학년이 되고, 학교에서 배울 때 필요를 느껴서 해도 늦지않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겠지,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른바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스물여섯 먹었을 때였다.
국장님이 무슨 생각이던지, 덜컥 보냈던 20만원짜리 녹색대학에서 하는 교육 단기과정 때였다.
(이 거 갈 때, 지출결의서에 1년안에 그만두지 않겠다는 각서도 썼었다.ㅋ)
내가 받아본 아주 고급스러운 강의들이었다.

장회익, 이필렬, 강수돌, 이정우.
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사는줄도 몰랐다.
게다가 이 사람들 앞에서 발표도 했다. 난 정말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인간인데, 그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글을 발표했다.
보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정말 내 글이 부끄러웠고 반면 용기를 얻기도 했다.

특히 강수돌 교수의 강의는 내 머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처음엔 난 그 교수님이 공산당처럼 보였다.
어머, 교수님 세상 너무 빡빡하게 사는 거 아니세요~?
강의를 듣고 강수돌 교수의 논문을 읽고 또 읽었다.
완벽하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왠지 내가 세상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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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길 거야

(보낸 문자메시지)

너무 슬퍼하진 말게
이게 우리의 현실인 걸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 거야
천천히..


글과 음악에 대한 내 모든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다.

좋은 글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며
좋은 음악은 가슴이 아프다.

우 상

그날 오후 3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아래위로 찢어졌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직접 소통하게 된 것이다.


성전은 ‘하느님이 기거하는 집’이라 여겨졌다. 모든 인간은 제사장을 통해서만, 성전이 정한 제물과 절차를 통해서만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었다.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독점한 성전의 지배층은 엄청난 영화를 누렸다. 성전이 정한 제물과 절차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버림을 받은 죄인이었다.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과 결탁한 장사꾼들을 불같은 분노로 내쫓은 예수는, 성전의 휘황함을 찬탄하는 제자에게 말한다. “돌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오늘 교회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성전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되새기는 것이다.


오늘 교회는 예수 앞의 성전처럼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독점한 채 온갖 세속적인 욕망을 좇는다. 그렇다면 그 교회들은 “벽돌 한 개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십자가가 솟은 건물에 강대상이 있고 성가대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고 해서 그곳을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기는 건 그저 우상숭배다.

교회에는 하느님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엔 하느님이 있다. 그러나 교회에 하느님이 있는 건 하느님이 세상의 모든 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교회에선 목회자를 사역자, 주의 사자, 주의 종이라 부르며 인간과 하느님의 소통을 대리하는 사람, 혹은 여느 인간보다 하느님과 좀 더 가까운 인간처럼 여기곤(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목회자는 성직이 아니라 하고많은 직업 가운데 하나, 노동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은 목회자나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도 목회자를 뭔가 성스럽고 특별한 인간으로 여기거나(주장하거나), 괜스레 어려워하는 건 역시 우상숭배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그런 우상숭배가 횡행하는 건 교회의 영업이익을 차지하려는 욕망과 관련이 있다. 예수 당시의 성전이 그랬듯이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은 우상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교회에 갇혀 있지도 목회자를 통해 있지도 않다.


하느님은 그를 찾는 모든 곳에, 그를 찾는 모든 사람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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