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오늘 언론에서 쌍용차 사태에 대한 보도에서 "경찰이 출입문을 확보했다"는 식의 보도를 접하자 그냥 경악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확보"라니, 마치 적군과 전쟁하는 "아군"에 대해서 보도를 하는 모양인 셈이지요. 파업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거점" 하나 하나씩 "확보"해서 결국 "진압", "박멸"해야 할 "범법자" 집단인가요? 잔인한 어법, 잔인한 사고이기도 하지만, 이 잔인성 이외에 커다란 문제는, 여기에서 거의 1천 명이 되는 노동자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정의" 그 자체가 짓밟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 애당초의 이명박씨의 "비과학적 소설" 격인 공약대로 - 연간 7%씩 성장한다 해도 정의 없는 나라는 결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부동산 버블이 터져 마이너스 7% 성장이나 안됐으면 좋겠지만, 성장이 되든 말든 인간들의 한 집단으로서는 정의는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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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의 일상성  
 
 
며칠 전, 학교 세미나차 런던에 갔었을 때에 한 번 같은 호텔에서 묵었던 어떤 서구인과 아침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서구의 한 "강소국" 출신으로서 로마와 희랍의 고전을 좋아하고 미국식 "정글 자본주의"를 매우 부정시했던 그에게 그의 출신 국가의 군인들이 지금 아프간의 남부에서 "탈레반을 섬멸시킨다"합시고 "인종청소"를 방불케 하는 식민지 전쟁을 하는 이유를 묻자 그가 "아이고, 순진하시네"라고 하듯 냉소적으로 웃고 당연하듯이 이야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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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이스라엘에서 키부츠 생활을 할 때, 예루살렘 시내에서 늘 마주치는 것은 총을 메고 다니는 젊은 남녀군인과 벽에 닭처럼 몰려 몸수색을 받는 아랍인들이었다.
특별히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군인들은 늘 아랍사람 누군가를 수색하고 있었다.
"Forigner"인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러 찻집에 가거나 버스를 타러 터미널에 갈 때, 입구에서 늘
소지품 검사를 당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야 했다. 우리는, 폭탄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기분 나쁜 일이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피해받은 자의 심리'를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겠다고, 피해준 자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가장 잔혹한 방식의 '파시즘'이 아닐까 싶다.

몇주 전에, 어떤 학술회의에 갔을 때에 서울의 한 "명문대"의 한 교수 분과 저녁 식사 자리에서 꽤나 끈질긴 논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요즘 "명문대"에서 "원어" (즉, 영어 - 참, 영어가 왜 "원어"인가?) 강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대다수의 선생들이 의무화돼 있는 그 "원어" 강의로 적지 않은 고생을 하는 듯한데, 제가 만났던 분은 오히려 그러한 강의를 즐기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아주 오랜 미국 체류에서 얻은 영어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선생의 신념상으로도 영어로 하는 강의 내지 학술만이 "진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즉, 통상적인, 대중적인 이야기야 "지역적 언어"인 한국어로 해도 되지만 학술적 등의 어떤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모든 저술들을 "유일무이한 세계어", 즉 영어로 하는 것이 "세계 지성인의 의무"라는 논리이었지요. 그 분이 국내에서의 영어의 "공용화"는 물론 나아가서는 아예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공용어가 바로 영어 (그 분의 표현으로는 "세계어")가 돼야 된다고 주장하시고, 과연 그들만의 세계에서 그토록 오래 살아왔던 중국의 지성인들이 영어에 그러한 대접을 해줄 것 같겠느냐는 제 질문에 경멸적으로 웃기만 하셨더랍니다. "저 후진적인 중국인들이 아직도 영어의 세례를 덜 받았다면 저들에게만 손해지, 뭐"와 같은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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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버거울수록 민중의 두뇌를 마비시킬 초강력의 마취제가 더 필요해서일까? 불황으로 영세민의 생활이 망가지고 노동 불안화 정책으로 비정규직들이 대규모로 양산되는 이 시대에, 시청자로 하여금 현실의 애환을 잊고 화면 속의 볼거리에 몰입하게끔 만드는 사극들이 유달리 많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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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우리를 무척 아프게 하는 일의 하나는 불행한 과거 기억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다. 대한민국의 많은 예비역들은 제대를 하고도 몇 해 동안 군대시절의 악몽을 꾼다. 필자는 최근 그런 ‘악몽’을 대낮에 꾸었는데,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게 검찰이 4년을 구형했다는 보도를 접한 것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강한 인상을 준 것은 한 일간지에 인용된 다음과 같은 문구였다.
“(검찰은) 재판에서 ‘피고인은 반미감정을 부추기는 등 북한 정권에 동조하는 주장을 되풀이해 젊은이들의 정신적 무장해제를 시도해 왔다’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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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시베리아의 한 군부대에서는 러시아 전국을 놀라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새해 전야에 얼차려를 받았던 한 신참이 고참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다리와 성기 등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어 절단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참 구타 근절의 문제가 잠시 도마에 올랐는데, 여론 ‘주류’가 주장한 제안은 헌병대 창설, 이전에 폐지되었던 영창의 복원, 군목 역할 강화 등의 ‘감시·처벌’ 방향의 안들이었다. 급진 좌파 쪽에서는 신·고참을 막론해 모든 사병의 권익을 대변할 ‘병사 협회’ 창설, 곧 병영 생활의 민주화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주류’ 언론에서 묵살하고 말았다.
1917년 2월의 민주혁명 이후 ‘병사 소비에트’ 덕분에 제정러시아 군대에서는 하급자에 대한 폭력의 병폐가 고쳐져 내전 시기의 적군(赤軍)에서 ‘고참 구타’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현재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의 징병제 군대에서는 일종의 ‘사병 노조’가 합법적으로 존재해 폭력 방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돈이나 학력, ‘빽’이 없어 군에 끌려온 총알받이들이 자신의 대표자를 뽑고 그들이 머리 빳빳이 들고 장교들과 동등하게 대화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내무반의 선거를 상상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는 아마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민주사회의 원칙상 군인도 자치권을 가진 시민이지만 지배자들이 볼 때 군에 끌려온 사람은, 다만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한치의 어김도 없이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하는 ‘국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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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자는 비참하다!’(Vae victis!) 이 라틴어 속담은 우리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윤 저하 위기에 빠져 비용절감 경쟁을 벌이는 각국 자본이 잉여가치 수취의 폭을 넓히기 위해 노동자들을 원자화한 개체로 만들려고 총공세를 펴는 상황에서는 ‘밀리면 죽는다’는 것이 철칙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의 ‘게임 룰’을 한번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본은 곧 노동을 고립시켜 박멸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편, 끈질긴 진지전을 편다면 이미 확보된 ‘영토’(예컨대 유럽의 경우 1945년 이후에 구축된 복지 시스템)를 지킬 뿐만 아니라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노동계의 전위를 담당했던 2만명의 광산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광업을 다시 구조조정하겠다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 맞서 1984년 3월 광산 노동자들은 총파업에 들어갔다. 약 1년 지속된 파업에서 몇몇 노동자들이 죽고 1만1천여명이 검거되는 등 치열하기로 전례가 없었지만, 정부에 포섭당한 다른 산업별 노련들이 연대를 거부한 탓에 광산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그 패배로 광산 지역이 세습적 빈곤의 지대로 변한 것은 물론, 신자유주의에 영국 노동계가 저항할 능력을 당분간 잃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이 70년대까지 확보해 온 많은 혜택들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무상 교육권을 잃은 영국 대학생들이 내야 하는 연간 약 500만원까지의 등록금이 한국에 비하면 싸지만 추세로 보아 몇 해 뒤 한국만큼이나 대학생들을 수탈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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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들의 자유분방도 기억하라

명성황후·유관순 등 ‘남’의 남성에 희생당한 여성들만 내세우는 한국사… 남성 독재로부터 탈주와 해방을 모색한 옥단춘·강완숙·월매는 모르시는가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역사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양성 불평등의 문제를 생각할 때 아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 주위의 가장 성차별적 영역이 바로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다. 역사 기억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군사 부문에서 여성이 오래전부터 배제돼온 점도, 1차 자료부터 여성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점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료가 비록 있어도 남성은 거의 자동적으로 여성 위에 올라오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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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 중국 비평가들이 아무리 허난설헌을 동생 허균보다 더 재능 있는 시인으로 봤다 하더라도, 국내에서 그녀는 ‘여류 문학’이라는 특수 범주로 들어가 업적이 과소평가된다. (사진/ <선현의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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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당대 중국 비평가들이 아무리 허난설헌(1563~89)을 동생 허균(1569~1618)보다 더 재능이 많은 시인으로 봤다 해도, 국내의 보편적인 의식은 허난설헌보다 허균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허난설헌이나, 남편이 나를 버리려 한다면 굳이 그런 남편을 붙들 일도 없다는 ‘쿨한’ 발언으로 유명한 시인 호연재 김씨(1681~1722) 등은 ‘여류 문학’이라는 특수 범주 속으로 들어가게 돼 있고, 이 범주는 (당연히 남성에 의해 쓰여야 한다고 인식되는) 일반 문학에서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변사또를 능가했던 조선의 선비들

이들은 그나마 ‘작가’로서 대접을 받으니 다행이다. 남성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등의 영역에서 족적을 남긴 여성이라면 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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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까닭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최근에 필자가 대중 강연을 했을 때 일이다. 월드컵 축구 광풍이 지나간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스포츠 애국주의를 국가가 이용하는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다. 발제가 끝나고 질의 시간에 청중 한 분이 물었다. “국가간 대항전 형태의 축구 시합에 빠져드는 것이 왜 위험한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운동 경기라도 보면서 응원하지 않으면 여가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로서는 그 질문을 듣는 순간이 일종의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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