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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흑산

by bravoey 2012. 3. 21.

꽤 오랫동안 읽었다. <강산무진>보다 더 느슨하다. 그래서 처음엔 고전을 했다. 단락단락 떨어지니 이야기가 이어지는 감이 없고 인물은 왠지 흑산의 흑자에 묻혀 버릴 듯 어둡고 잔인한 운명들이다.

천주교에 연루된 정약전과 그의 조카사위이자 조선 천주교회 지도자인 황사영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들을 둘러싼 마부 마노리, 하급관리인 박차돌, 노비와 어부는 그 시대의 가장 낮은 자들이 보여주는 운명과 삶은 그야말로 어둡고 잔인하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오동희의 기도문과 특히 소나무에 세금을 매겨 힘들게 하자 어린 소나무 뿌리를 보는대로 뽑아내는 장팔수의 이야기는 얼음칼처럼 가슴을 차갑게 찌른다.
정약전과 황사영의 다른 선택 또한 인상적이다. 한 명은 타협을, 한 명은 순교를 선택했지만 그들의 선택 모두 역사다. 어떤 신분으로 살았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시대를 사는 모든 개인의 선택이 결국은 큰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라는 말이 통하지 않던 시대, 개인의 삶이 주는 고통의 무게가 고스란히 와 닿는다. 그 고통이 결국은 우리로 귀결됨을 알면서도, 고통의 순간에 우리를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종교란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었을까. 민초들의 천주교를 믿게 되는 것 그 근원에는 우리에 대한 욕망이 자신의 삶을 구원할지도 모른다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의 문장은 늘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좋은 무기, 나도 갖고 싶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김훈에게도 변화는 가능할까. 좋은 무기를 가지고 꽤 오래 하나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를, 그에게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