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테레사가 운영하던 인도 캘커타의 어린이집 벽에 새겨있는 글이다.

1.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 게다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2.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3. 당신이 성공하게 되면 가짜 친구와 진짜 적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4. 오늘 당신이 착한 일을 해도 내일이면 사람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5. 정직하고 솔직하면 공격당하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게 살아라.

6. 사리사욕에 눈 먼 소인배들이 큰 뜻을 품은 훌륭한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7. 몇 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탑을 쌓아라.

8.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라.

9.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해도 칭찬을 듣기는커녕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헌신하라.

10. 사람들은 약자에게 호의를 베푼다. 하지만 결국에는 힘 있는 사람 편에 선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분투하라.

곰곰히 생각해본다.
치밀어오르는 불안함,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 걸까 생각한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내게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불끈하고 일어나는 분노는
뭘까.

이런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것이 연유가 있는 분노인지, 불신인지
확신하기가 어려운 건
나에 대한 불안, 불확신 때문이다.

일의 흐름을 알고 있으면 이토록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잘 알고 있다면 더 그랬을 것 같다.
아직은 안개처럼 먼 곳이 보이지 않고
한치 앞 보이는 것들만 쫓고 있어 그런 것 같다.

안개가 걷히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그 시간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하루하루 쩔쩔매는 것 같다.
동료들이 혹 나태하거나 포기하지 않을까
쉬이 판단하고 뭔가 해야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휘둘리는 것.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며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

각오는 했지만 정말 힘든 시간이다.
부디 나중에는 다른 이야기가 쓰여지길.
나를 더 믿게 되길.
이 시간이 내게 주어진 이유를 깨닫게 되길.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별 간격 없이 흐르는 시간임에도
어떤 날과 어떤 날이 있었다 말할 수 있는 것,
낯선 감정을 연습하게 하는 당신 덕분에
사는 연습을 조금씩 하게 되는 것,

남들이 그렇게 새날이다 외친 들
그 날도 다른 빛깔의 어떤 날일 수 있는 것.

매일 다른 빛, 그대.
그대 내게 행복을 주시길.
매일 다른 행복을, 삶의 모양을 다르게 그려내도록.

오늘 시키지도 않은 택배가 와서 보니
한겨레출판에서 보낸 정여울 <마흔에 관해서> 였다.

이걸 나한테 왜 보냈나 궁금해 찾아보니
<마흔문학상> 에서 아쉽게 탈락한 여섯분 중 한 명이었다 ㅋㅋㅋ

감사히 읽겠습니다!

http://me2.do/GrzhmZBK

청이 심하세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로 나왔어요.”

서른 아홉, 난청이란다. ‘일상생활 잘 하고 있다고 반문해 보았지만 뭐, 검사결과인 숫자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사람들 말을 한번에 못 알아들은 적이 많았던 최근이었다. 이비인후과 가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둘째 육아휴직이 끝나고, 두 번째 복직 기념으로 기분 좋게 간 건강검진이었는데 난데없는 결과를 받아들고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직업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지라 잘 듣는 것은 내겐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기분, 의도까지 잘 알아채야 하기에 난청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10년을 넘게 남의 말에 신경쓰고, 귀 기울이며 살다보니 이제 덜 들어도 된다고, 몸이 제 스스로 귀를 닫아버렸나 싶기도 했다. 네 몸 하나에 걸린 수많은 관계의 실들이 버겁다고 그랬나 싶었다. 그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진 않으니 좀 덜 듣고 살자 하며 이비인후과는 가지 않았다.

난청인 서른 아홉 마지막 길목에서 차라리 귀를 닫고 싶은, 듣지 말아야 할 소식을 들었다. 스물 넷 청년의 죽음. 스물 넷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에서 푸른 잎이 쏟아질 것만 같은 그 청춘의 죽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그저 듣기만 했지만 나도 울고, 세상의 어떤 많은 이들이 울었다. 제일 슬픈 것은 그 청년의 말을 세상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말하고 있었을텐데, 죽음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을텐데! 들었어야 했다고, 더 잘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잠시 내려놓으려 했던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은 모든 일의 원인이자 결과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누군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해주고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내려 했더라면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세월호 노란리본을 품고,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사람들이 엮어내는 긍정적인 힘이 세상을, 또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경험했지만 나는,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허망하게 한 청춘의 원인결과를 보고 있다.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세상 흐름 한 번 바꿔놨으니 이제 다 잘 될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나보다. 그 흐름은 얼마나 변했는지 따져보고 물어보지 않았다.

스물 넷 푸른 잎 무성했던 청년이 내게, 사람들에게 목숨으로 말을 했다. 난청인 서른 아홉 나에게도 말이다. 들으라고, 내 말을 들어보라고. 더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서른 아홉이 가기 전에, 마흔이 오기 전에 이비인후과에 가야겠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엮어 그 청춘의 죽음에 책임질 수 있는 작은 흔들림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마흔이 되도, 쉰이 되도 언제나 해야하는 숙제다. 머무르지 말자. 가자, 이비인후과로.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