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이 심하세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로 나왔어요.”

서른 아홉, 난청이란다. ‘일상생활 잘 하고 있다고 반문해 보았지만 뭐, 검사결과인 숫자앞에서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사람들 말을 한번에 못 알아들은 적이 많았던 최근이었다. 이비인후과 가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둘째 육아휴직이 끝나고, 두 번째 복직 기념으로 기분 좋게 간 건강검진이었는데 난데없는 결과를 받아들고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직업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지라 잘 듣는 것은 내겐 중요한 일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와 기분, 의도까지 잘 알아채야 하기에 난청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10년을 넘게 남의 말에 신경쓰고, 귀 기울이며 살다보니 이제 덜 들어도 된다고, 몸이 제 스스로 귀를 닫아버렸나 싶기도 했다. 네 몸 하나에 걸린 수많은 관계의 실들이 버겁다고 그랬나 싶었다. 그래,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진 않으니 좀 덜 듣고 살자 하며 이비인후과는 가지 않았다.

난청인 서른 아홉 마지막 길목에서 차라리 귀를 닫고 싶은, 듣지 말아야 할 소식을 들었다. 스물 넷 청년의 죽음. 스물 넷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에서 푸른 잎이 쏟아질 것만 같은 그 청춘의 죽음에,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그저 듣기만 했지만 나도 울고, 세상의 어떤 많은 이들이 울었다. 제일 슬픈 것은 그 청년의 말을 세상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말하고 있었을텐데, 죽음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을텐데! 들었어야 했다고, 더 잘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잠시 내려놓으려 했던 사람의 말을 듣는 일은 모든 일의 원인이자 결과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누군가 그 청년의 말을 듣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전해주고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내려 했더라면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세월호 노란리본을 품고,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사람들이 엮어내는 긍정적인 힘이 세상을, 또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경험했지만 나는, 그것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허망하게 한 청춘의 원인결과를 보고 있다. 잠시 쉬어도 괜찮다고, 세상 흐름 한 번 바꿔놨으니 이제 다 잘 될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나보다. 그 흐름은 얼마나 변했는지 따져보고 물어보지 않았다.

스물 넷 푸른 잎 무성했던 청년이 내게, 사람들에게 목숨으로 말을 했다. 난청인 서른 아홉 나에게도 말이다. 들으라고, 내 말을 들어보라고. 더 핑계를 댈 수가 없다. 서른 아홉이 가기 전에, 마흔이 오기 전에 이비인후과에 가야겠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엮어 그 청춘의 죽음에 책임질 수 있는 작은 흔들림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마흔이 되도, 쉰이 되도 언제나 해야하는 숙제다. 머무르지 말자. 가자, 이비인후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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