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요즘에는 삶이 무척 비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삶보다는 타인을 위한 중보자의 삶을 살고 싶기 때문에 나에게 적절한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환경운동을 선택할 때의 나는 '환경'보다는 '운동'에 주목했고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한 채, 덜컥 선택해 버렸다. 사실 이게 맞느냐, 아니냐에 관한 말도 안되는 기도도 했다. 적어도 나에겐 하나님은 맞다, 틀리다를 이야기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늘 그랬듯, 별 싸인없으면 그냥 열린 길로 들어갔다. 약간의 불안함과 두려움은 있지만, 난 그런대로 잘 해내는 편이다.울렁대는 가슴으로 들어갔지만 내게도 위기가 닥쳤고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뱉어보았다. 한번더라는 싸인에 다시 한 번 더라고 이야기하고 돌진했다. 이제는 위기는 건너가 버린 것 같다.
위기를 떨친 나에게 닥친 또다른 위기는 한 발 더 나아갈 것에 대한 두려움과 태산같이 남은 과제와 고민들이다. 환경운동을 하는 내가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넓지 않아서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나는 실천가로서는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생각하는 것은 많지만 그만큼 실천이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숨이 탁 막힌다. 나는 과연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질문에 충실히 대답할 수 있을까?
내게 삶의 기준은 늘 '예수'였다. 그는 세상을 따라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분명히 거슬러 살고 있었다. 그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 즉 '본질'을 꿰뚫는 삶이었다. 그는 절망하지도 않았다. 사랑했고, 희망을 가졌으며 평안했다. 내 삶도 늘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물어보면,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눈앞이 하얗다. 나는 아직도 세상을 따라 살고 있으며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절망하고 불안하다. 두렵고 두렵다. 조바심이 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내일이 오면 나는 또 다가오는 시간들을 마구 맞아들인다. 늘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치면서 다음을 받아들인다. 곧 정리되지 않으면 순서를 놓친 채 어영부영 살아갈테지.
지금 나는 시간을 잠시 잡아두고 정리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 제대로 한 발 나아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