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굶주리는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우리에게는 정의에 대한 굶주림을 주소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소비로 평가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정의에 대해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이 시대는 빵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더 많은 빵을 얻기 위해, 빵이 없는 자들을 밟아버리기도 한다. 그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거나 합리화 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 책에서 찾은 보물은 "자기가 몸담은 사회 질서의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의 사명 가운데 하나다"라는 부분이다. 신앙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에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라 말한다.
이 책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신을 현대 사회 질서에 끼워넣어야 하는 가, 어떤 방식으로 투쟁할 수 있는 가에 대한 여러가지 설명들로 구성되어있다.
어렵긴 했지만 내가 많이 접하는 현대사회의 흐름에서 파생되는 여러 사회 문제들(민족주의나 빈부격차, 도시문제)과 어떻게 실천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살살 긁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긁기만 하고 말아서 늘 문제지만. 요즘 내가 과연 운동을 하면서 사는 건지, 운동을 하고 있다면 신앙적 사명에 의해서 잘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다시 한 번 뒤집어보게 되었다. 이제 잘 정리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내 몫이다.
정리해 둔 문장들
합리화된 행위란 전통에 따른 행위와 달리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 혹은 어떤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지를 다소 의식적으로 성찰하는데서 생긴다
구원의 절대적 가치는 세상에 그 고유한 자율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구원이 이미 거기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가 바로 인간 역사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모든 인간 존재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만일 구원이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고 또 죄가 억압적인 사회 구조로 표면화된다면, 그런 구조를 없애려는 투쟁은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구티에레즈
우리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해를 입고 있다고 분명히 말해야 하고, 그것은 곧 피해자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억압자에게 대항하여 피해자와의 연대를 선언하는 일이다.
착취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는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주님을 고백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과 대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커다란 슬픔이다.
샬롬이란 인간이 모든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는 상태이다.
샬롬안에 거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누리는 것, 자기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을 누리는 것, 동료들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 자신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이다.
샬롬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그 분을 기쁘게 섬기는 상태를 가리킨다.
샬롬은 자연과 바르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물리적 환경을 기뻐하는 상태다.
나는 민족주의란 한 민족이 자신들에게 무언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그 민족이 스스로 병들었거나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인지했을을 시사한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지만, 예배의식에 대해서는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라고 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예배는 행진명령을 내리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에 감사하여 자비와 정의의 사역을 행하면서 기억하고 기대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 또한 우리에게 그 분의 행위를 예배로써 기념하라고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일과 예배는 이런 면에서 서로 진정성을 확증해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