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기를 세번이다. 그나마 갈아타는 재미라도 있어 피곤함을 잊었던 것 같다. 도착하니 저녁 6시 반. 배낭을 맨 내 모습이 조금 민망하게 느껴졌다.
2.
택시를 타고 도착한 첫 날 숙소는 '선도산방' 경주 시내에 있는 민박집이라고 볼 수 없게 운치있고 조용한 곳이었다. 집구조는 전통한옥이었고, 장지문에 옛날 집 냄새가 물씬 났다. 주인아주머니는 머리가 하얗고 고우신데 이런저런 배려를 많이 해 주셨다.
여주에서 절밥을 먹고 내리 온 걸음이라 배가 무척 고팠다. 슬프다, 경주오면 맛난 거 먹고 싶었는데 첫날 저녁은 바로바로바로
숙소 앞 편의점 총각이 아주 재밌다. 한 남자손님이 들어와서, "디스 플러스 있습니꺼?" "저희는 수입담배가 지금 없습니더." "디스...플러스가 수입담뱁니꺼...?" 화들짝 놀라는 총각, 죄송하다면서 디스플러스를 꺼내준다. 재밌는 총각일세.
1박2일을 열심히 보면서 허기를 채운 뒤, 지도를 펼쳐들었다. 지도에 표시된 여러가지 유물유적을 보니 삼일만에 돌아보기엔 택도 없었다. 양국장님이 추천해주신 책,
'답사여행의 길잡이, 경주편'이 있어서 꼭 가볼 곳과 가보지 않아도 될 곳을 골라낼 수 있었다. 그냥 가서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유물에 담긴 역사나 의미 등이 좋은 문장으로 잘 설명되어 있어 좋았다. 여주에서 오는 내내 붙잡고 읽었는데 대략 불국사와 감포앞바다, 남산 쪽으로 가닥을 잡았었는데 막상 오니까 경주시내 쪽을 만만하게 본 것 같다. 나름 배낭여행 몇 번 해봤다는 자부심으로 삼일안에 여기저기 다녀보겠노라 굳게 결심했다.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여행은 참 신기하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긴장하게도 하고, 편하게도 한다. 혼자 떠난 길이라 걱정도 되지만, 늘 그랬다. 내가 불안해하는만큼 일이 커지지 않고, 내가 상상하는만큼 일이 복잡해지지도 않는다. 복잡한 건 내 머릿속일 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주일내내 외갓집 식구들 사이에서 지내다보니 머리가 복잡한 건 사실이었다. 왜 그렇게 말들이 많은지, 왜 그렇게 서로들 틀어지려고 바둥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질릴 정도로 외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이 내게는 복잡했다. 잠자리를 펴고 누워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정리해보는데 세심한 오군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설핏 잠이 들었는데 황장군과 미인, 유리창 생각이 났다.
참 이상하지, 사람이 싫어 떠난 여행길에 제일 먼저 찾아드는 마음이 외로움이라니.
3.
불을 끄니 칠흑처럼 어둡다.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장지문 밖으로 바람에 떠밀려 간간히 울리는 종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방에서 나는 냄새가 예전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댁 기와집 냄새같다. 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