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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글들/칼럼 및 짧은 글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by bravoey 2011. 6. 3.

매년 그랬듯 6월 5일 환경의 날을 맞이한다. 환경의 날을 맞이하는 마음은 ‘캄캄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2010년 12월부터 많은 생명을 죽음에 빠트린 구제역, 일본 열도를 공포로 밀어넣은 지진과 핵사고, 2009년 8월부터 강의 뭇생명 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죽음에 빠뜨린 4대강 사업. 이런 일들이 일어난 원인이 ‘인간의 욕망에 따른 선택’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역효과가 이제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고 있다. 그것도 생명을 위협하는 모양으로 말이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도 많고, 환경을 지키는 방법은 넘쳐난다. 하지만 필자는 방법이나 기술 이전에, 환경의 핵심인 ‘생명’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생명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어떨까?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생명을 대해야 하는지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식은 넘쳐나지만 희생당한 생명을 깊이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유 없이 죽어간 가축들에 대한 속죄 없이 구제역을 말하고, 핵사고로 죽어간 생명의 대한, 4대강사업 속도전에 희생당한 노동자들의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 없이 ‘발전’을 말해도 되는가. 먹고 사는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냥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을까. 마음 속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의 우물물이 말라 퍼올릴 눈물이 줄어가도록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을까.
 먹고 사는게 바빠도 인간은 숨이 붙은 생명이다. 구제역으로 죽어간 가축들의 생명과 내 생명의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체르노빌에서, 일본에서 발생한 핵사고로 슬픔을 당한 수많은 생명이, 4대강사업 속도전에 죽어간 노동자들의 생명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미국의 곤충학자이자 ‘생물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유명하게 만든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은 “인류는 자신이 창조한 것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파괴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선택권이 있다. 더 이상 ‘파괴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선된다. 그런 성찰 없이 아무리 녹색을 외친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환경의 날, 이런저런 기념행사들을 뒤로 하고 조용히 앉아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을까?



* 제목은 실천윤리학 분야의 거장이자 동물해방론자인 피터 싱어의 저서(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피터 싱어/세종서적)를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