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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인권

국가폭력에 불복종하라 - 박래군

by bravoey 2006. 5. 14.

 

[기고] 2006년 5월 우리가 확인한 ‘국가폭력’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2006년 5월 4일과 5일, 난 그 ‘전쟁’의 한 복판에 있었다. 그 전쟁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월등히 우월한 우위를 점한 한 쪽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인한 파괴로 끝났다.
전의경 110개 중대, 1만 1천명. 군 병력이 2천명이 넘는다고 했고, 용역으로 동원된 이들만도 7백 명이 넘는다고 하는 이들과 맞서서 싸워야 했던 이들은 겨우 1천 명이었다. 황새울 들판과 대추분교를 두고 접전을 벌였지만 거의 맨몸이었던 평택 지킴이들은 5월 4일의 전투에서 처절하게 당해야 했다. 유혈이 낭자한 가운데 대추분교에서 3백 명 가까운 이들의 저항이 끝나고, 대추분교 지붕 위의 신부님들이 내려온 뒤 투쟁의 거점이자 상징이었던 대추분교는 포클레인 삽날에 쉽게 무너져 내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도 전에 황새울 들녘은 헬기들이 공수한 철조망으로 차단되었다.
그렇지만 5월 5일 1천 명 정도의 비무장 시위대는 황새울 들판의 철조망을 20여 군데 절단하고, 민간인 접근 금지 팻말을 달아놓고 국방부가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선포한 그곳을 행동으로 부정했다. 군인들은 처음에는 분명 당황한 모습으로 민간인과의 충돌을 피하는 소극적인 대응의 모습을 보이다가 곧 태도를 돌변하여 민간인 시위대를 땅에 엎어놓고, 마치 미군이 이라크 전쟁 포로를 묶듯이 포승줄로 손을 묶고 목에 걸었고, 그 위에다가 곤봉과 몽둥이, 군홧발 세례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화풀이를 하듯이 경찰은 그날 밤 주민 촛불집회를 마치고 귀가하는 시민들을 한밤중에 영장도 없이 무조건 연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행 이유를 묻지 말라! 그들은 당당했다. 그리고 온 마을을 새벽 무렵까지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정부의 각 부처들의 비난이 쏟아졌고, 때를 만난 듯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군인을 공격한 시위대를 일방적으로 매도했다. 군에게 폭력적인 대응을 선동하고, 시위대를 빨갱이로 매도했다. 주민과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평택범대위) 간의 분열을 획책했다. 반미단체들이 주민들을 선동하고 투쟁을 부추기고 있으며, 주민대책위의 간부들은 수십억의 갑부들인데 생존권은 말도 안 된다면서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의 의미를 폄하했다.
경찰은 수시로 마을 외곽을 봉쇄하고, 마을 곳곳을 떼 지어 다니며 이동했고, 수배 중인 대추리 이장 김지태 씨를 찾는다고 영장도 아무 집이나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마을 주민 소유의 시설물들을 마구 파괴했고, 도두2리 주민들이 식수도 차단하는 짓을 저질렀다. 마을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논농사로 한 평생을 살아온 주민들은 철조망으로 가로막힌 논을 바라보며 울어야 했다.
그 ‘전쟁’에서 현 정부가 걸핏하면 내놓던 ‘인권’이란 카드는 없었다. 오로지 피에 굶주린 전쟁광들의 살육이 있을 뿐이었다.
그곳에 ‘인권’은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인권침해는 거의 모두 일어났다. 당시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고 있자면 어떻게 그와 같은 아수라장에서 죽지들 않고 살아났는지 의아할 정도다.
보수단체와 언론들은 시위대가 ‘비무장’의 군인을 공격하는 장면만을 주로 강조하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안다. 국방장관이 비무장으로 투입한다던 그 군인들은 이미 곤봉을 지급받고 있었다. 황새울 들에서 시위대를 맞닥뜨린 군 병력들은 곤봉과 작업에 쓰는 몽둥이를 들고 민간인 시위대를 공격했다. 1980년 광주 이후 군인이 민간인을 폭행하고, 제압하는 장면이 국방장관의 말이 거짓임을 증거라도 하겠다는 듯이, 군에 대항하면 용서가 없다는 듯이 그들은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었고, 제압했다. 그러고도 앞으로는 자위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해대는 것이 국방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