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사회가 하나의 체제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인가, 사회주의인가, 또는 공산주의 체제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이 정치 전체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도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정책으로 크고 작은 일체의 것들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 의료 또는 사회 복지 제도는 물론 경제, 사회, 외교 등의 정책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체제적 발상에 위험과 착각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구소련이 보여주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체제적 사고와 정책의 실패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삶을 생각하는 데에는 체제적 전제는 불가피하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정책들이 논의되고 대통령 선거에서 정책이 주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된다.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회가 하나의 체제라고 할 때, 정책은 체제를 움직이는 데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기준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일의 바른 추진을 위하여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이다. 또 그것은 현실 자원의 제한 속에서 여러 정책들로 하여금 상호모순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에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겠다는 잡다한 단편적인 정책들이 가장 큰 득표 효과를 갖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일관성은 사회적 삶의 근본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다.
-대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1992년 선거 유세에서 유명하게 된 말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는 것이 있지만, 경제는 어디에서나 오늘의 정치적, 사회적 과제로서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일이지만, 경제는 사람의 삶의 경영에서 기본이 된다. 여기에서 삶이란 최소한의 존명(存命)이 될 수도 있고, 보다 활달한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필요가 우선한다. 이 점이 문명된 사회에서 고용이나 사회 안전망 그리고 의료, 교육, 연금 등의 제도가 정책적 대상으로 크게 부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길고 넓게 보면, 건강하고 훈련된 노동력이 없이 또 사회적 평화가 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도 잘 되어 갈 수가 없다. 완전고용이나 완전한 사회복지 제도가 결국은 경제 전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어 당초의 사회적 목적을 실패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는, 사회 전체의 행복과 번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이 경제만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선진사회는 이제 ‘탈물질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부의 확대보다 삶의 질에 있고, 그것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 문제가 이슈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로 설명된다. 이것은 ‘부유한 다수자’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은 부보다 복합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은 이 이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부유한 다수’가 이제 이것을 다시 발견한 것은 경제발전이 가져온 환경 파괴 속에서 살아남는 데에 자연 보존이 절실한 과제가 된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나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에서, 환경의 문제는 최종적인 심급이 된다.
환경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환경-멀고 가까운 나라들이 이루는 세계적 국가 공동체제라는 환경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외에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남북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영위하는 정책은 이 모든 것을 상호 관계 또 일관성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삶의 큰 테두리를 다스리는 것만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기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은 계획경제였다. 자원 발굴, 생산, 분배 등을 전체적인 합리적 계획으로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프라를 구축하고 체제의 토대를 정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후의 유연한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사회적 삶의 다른 부문에서도 사회에 대한 체제적 접근은 체제의 기초적 정비와 확립을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었으나, 행복과 사회 평화의 자발적 근원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책의 일관성이나 전체성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수많은 작은 사실에 밀착하여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유연성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도 정책의 빈곤보다도 현실에서 들어오는 결과를 입력하고 조율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빈부 격차 해소나 부동산 투기 억제의 정책들은 모두 목표에 반대되는 결과를 냈다. 작금에 논의의 대상이 된 대학 입시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부의 정책은, 모순은 아니라도, 정책 수행방식의 불균형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게 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목표는 정당하다하더라도 그 목표와 관련해서 고교 내신 성적의 일정한 처리를, 무리를 무릅쓰고 대학에 강요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 것 같지는 않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교육 철학 자체도 문제라 할 수 있다. 참다운 교육의 목표는 용이 못되는 사람에게도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용이 나온다면, 그 한 열매일 뿐이다. 물론 국가는 용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것은 상치되는 목표들을 수용하는 더 복잡한 정책 대안이다.)
-제도와 현실 조율능력 살펴야-
제도가 참으로 인간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 되게 하려면, 끊임없는 점검과 수정과 정밀화가 있어야 한다. 의료제도를 비롯한 여러 복지제도의 현재 운영 상태는 구소련에서의 어떤 생산 체제, 가령, 구두 생산체제를 생각하게 한다. 체제 붕괴 후 터져 나온 이야기의 하나는, 소련에 구두는 많았지만, 발에 맞는 구두를 찾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구두를 한 가지 크기로 제조하는 것이 할당량에 맞추는 쉬운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정책은 있어도, 현실과의 조율이 없는 곳에서, 관료기구의 확대와 통계 숫자는 구체적 현실을 대신한다. 참여정부는 무수한 정책 로드맵을 내 놓았다. 또 수없이 위원회를 만들고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정책 입안자들은 거기에서 성취감을 가졌을 것이다. 정책을 현실에 맞추어 섬세하게 조율할 수 있는 능력만이 정책을 현실이 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율에 바탕이 되는 것은 현장에 움직이는 인간적 감성이다. 지도자의 자질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책의 고안과 수행에는 포괄적이고 유연한 지적 능력, 강한 실천적 의지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 정책의 여러 함의 그리고 예산 문제를 포함한 현실성에 대한 평가가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 측면의 평가는 더욱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됨이 정책, 그 설명의 현장, 그리고 이런저런 기회에서의 언동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지도자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정책, 현실적 유연성, 인간성-정치지도자의 자격과 관련하여, 이러한 항목들을 평가의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