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거세던 바람소리가 아침에는 한층 더 크다. 싸들고 온 옷을 다 껴입고 장갑도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배낭은 최대한 가볍게 하고 바나나와 카스테라를 하나 챙겨넣는다. 오늘도 왠지 밥을 못 먹을 것 같은 기분이다. 숙소에서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시골길을 내려갔다. 바람이 여간 센 것이 아니다. 남산이 마을을 크게 감싸고 있다. 어제 지도에서 보니 이 마을에도 몇 개의 유물이 있었는데 내려가다 보니 '나정'이 보인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라는데 방풍림처럼 조성된 나무들과 우물터 등이 있었다. 바람이 하도 거칠어 나무들이 흔들흔들 거리는데 꽤 섬찟했다. 주변에 사람도 없는 시골인지라 사진 몇 컷 찍고 냅다 달려나왔다.
2.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양남행 150번 버스를 타고 봉길해수욕장을 향해 갔다. 동해바다에 떠있는 문무왕릉(대왕암)이 거기에 있다. 경주에서 1시간 정도 바다가 아닐까 싶은 덕동호가 펼쳐진다. 대청호도 멋있지만 덕동호도 힘찬 물살에 생명력이 묻어난다. 봉길해수욕장에서 내리니 눈 앞에 너른 동해바다가 펼쳐진다.
바다는 역시 겨울바다가 좋다. 바다는 바람과 맞부딪쳐 파도를 만들어내고 힘을 받는 것 같다. 겨울바다는 힘이 넘쳐서 좋다. 인생의 고민은 다 던져버리라는 듯 큰 소리로 인사를 한다. 그 바다 위에 대왕암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다. 대왕암은 오래전부터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른 산골처로 알려져 왔다고 한다. 문무왕은 백제정벌에 이어 고구려 정벌을 승리로 이끌었고, 신라에 대한 당나라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까지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뤘다고 한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을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저 멀리보이는 바위섬이라지만, 문무왕의 용기가 바다를 통해 느껴지는 것 같다.
3.
이견대를 갔다가 시내에 있는 교회를 가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 해변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봉길교회였다. 문이 닫혀 있어 예배를 드리는 걸까 고민했는데 이견대 가는 길에 바다에 빠져 화장실로 오는 길에 보니 예배당 문이 열려 있었다. 화장실에서 발을 닦고 양말의 물을 쭉 짜내고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반주를 하고 계신 할아버지였다. 흔히 교회반주는 자매들이 하는데 말이다. 사람 좋아보이는 할아버지는 바로 장로님이셨다. 반주하시고, 대표기도하시고, 광고도 하시고 바쁘셨다. 특별찬양이라는 순서도 있었는데 이 때도 등장하신 장로님, 트럼펫을 가쁜 숨 몰아쉬시며 연주하시는데 멋지셨다. 그 나이에 자리에 앉아서 점잖은 척 않고 이 일 저 일 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목사님은 여호수아 1장 1절-9절 말씀을 읽어주시고는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 여리고성을 어떻게 함락해야 할까를 물어보셨다. 나 정도 짠밥(?) 되니 머리속에 슬슬 목사님 설교방향이 정해졌다. 기도, 순종 등등. 그런데 목사님은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던지셨다. 뭘 하든 시도하고, 전진하고, 가라고 말이다. 고민은 해라, 어디로 갈 건지, 무엇을 할 것인지는 반드시 고민해라, 끊임없이 물어보고 전진해야 방법이 깨우쳐진다. 그것이 주는 영적쾌감은 말할 수 없다.
덤벼봐라.
예배당에 앉아 있는 분들 중 가장 젊은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기도해라, 말씀봐라보다 더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가 봐라, 덤벼봐라. 그렇지 않으면 방법도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연말에 생각만 많고 자신감 없고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주 많이 실망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계속 실망스럽다. 문제는 그거였다. 가보지도 않고 재고 판단한다는 사실이었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려든다는 것이었다. 해보지 않으니 방법은 알 턱이 없었을텐데, 무엇에 그렇게 겁을 먹었던 것일까. 누구에게가 아닌 바로 나에게, 용기를 내라고 충고했다. 용기를 내서 세상에 덤벼라, 예수가 사셨던 그 모습처럼.
봉길교회의 새해 기도제목은 30명의 교인을 전도하는 것이었다. 내가 받은 은혜만큼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 꼭 함께 기도하리라 다짐했다.
4.
교회분의 차를 얻어타고 이견대에 갔다. 그저 전망대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대왕암의 모습도 참 멋있더라.
5.
시내로 나와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숙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마지막 밤이다. 왠지 말이 없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