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나를 깨운 것은 장지문에서 우당탕탕하고 떨어지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이 누므 시키, 아침부터 곡예를 하고 난리야. 문을 벌컥 열어보니 개도 한 마리 있다. 이를 닦으며 정원을 둘러보니 마당에 있는 세숫대야가 정겹다.
마당을 따라 이어진 돌담길도 걸어보았다. 혼자라는 건, 이런게 좋다. 여유있게 걸음을 옮겨볼 수 있다는 것. 일정에 쫓기듯 다니던 것이 벌써 몇 해던가 싶다. 오늘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기로 한다. 아무래도 해가 짧으니 여러군데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주요한 지점만 찍어보기로 했다. 떠나려는 길에 아주머니가 커피를 내주셨다. 마루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으니 웃음이 난다. 돌아가서 다시 바쁘게 살아갈 때, 이 순간이 얼마나 그리울까 싶다. 적당히 쌀쌀한 아침공기와 조용한 마당의 그림자, 참치깡통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철없는 강아지의 모습이 정말 그리울 것 같다.
2.
짐을 지고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시내를 나섰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니, 외국인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불국사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기사아저씨와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가 정겹다. 불국사는 경주시내에서 20분정도 걸렸다. 오는 버스가 거의 불국사 가는 버스라 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차비는 1500원. 경주는 입석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관광지로 가는 버스는 무조건 좌석버스라 차비를 아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걸어가기엔 너무나 춥고 멀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가족들이다. 버스에서 내려 5분정도 올라가니 매표소가 보인다. 관람료가 4천원이었다. 불국사 대웅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원 쪽을 둘러보았다. 작은 호수가 조성(?)되어 있었다.
분명 그 나라, 그 시대에도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작은 물소리와 작은 새소리, 흔들리는 호수에 비치는 세상. 나처럼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머릿속이 텅비는 차분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작은 호수에 작은 배를 띄워 그 머릿속을 식혔을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호수 속 세상을 물끄러미.
불국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자하문을 향하는 청운, 백운교와 안양문을 향하는 연화, 칠보교라는 석축을 중심으로 석축아래는 범부의 세계, 석축 위는 불국으로 나뉜다고 한다. 들어가기 전 석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청운, 백운교 옆에는 물구멍이 하나가 있는데 원래 석축 아래에 있었던 연못에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구멍일 거라고 한다. 이 수구에서 연못으로 물이 떨어지면 거기에 이는 물보라에 무지개가 떴다고 한다. 못 위에 놓은 청운, 백운교와 연화, 칠보교, 긴 회랑과 경루, 종루 등 높은 누각들이 거꾸로 물 위에 비쳤을 것이라고 하니 그 광경이 참 멋졌을 것 같다.
자하문 뒤로 대웅전에 들어서면 그 이름도 유명한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이다. 석가탑이 약간 밋밋하다면 다보탑은 변화가 많다. 그리고 화려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보탑 주변에 많이 모여있다. 포인트, 돌사자 앞에서 사진을 많이 찍더군.
사각 기와집 앞에 놓은 돌사자는 원래 네마리였는데 지금은 한마리만 남아있다. 다보탑의 화려함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연꽃모양의 받침대 위에 앉아있고 세월을 타 얼굴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다. 긴 세월을 거기에서 외롭게 지켜온 탓인지, 왠지 쓸쓸해보이기도 한다. 가로뻗친 사각 기와가 하늘로 솟을 듯 강인해보인다. 파란 하늘로 날아갈 듯 네 각이 모두 하늘로 솟아있다. 화려함 안에 강인함이 보기 좋았다.
석가탑은 4:2:2의 비율로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밑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을 고려한 것이라고 한다. 석가탑 아래의 팥방금강좌가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팥앙금으로 읽고 이해한 건, 왜 그런 걸까. 단팥빵처럼 생겨서 그랬나부다. 아, 뭐든 먹는 것으로 귀결되는 스물 여덟이여. 사진찍느라 정신 없는 틈에 한 노인이 석가탑 앞에서 절을 한다. 그냥 형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세 번 길게 절을 했다. 석가탑처럼 단아한 노인의 등을 보니 외할아버지의 영정 앞에 허리를 숙이고 울던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의 등은 왜 슬펐던걸까, 이제는 자식이라는 짐도, 남편이라는 짐도 없는데.
이어 무설전과 관음전, 비로전, 극락전까지 회랑을 따라 걸어보았다. 유물 앞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전에 이집트 갔을 때가 생각났다. 남는 건 사진 뿐이라는 슬로건 아래, 피라미드만 나타났다 하면 무조건 찍었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그 때, 그 피라미드에 대한 느낌을 충분히 마음에 담아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나중에는 내가 찍어놓고도 여기가 어딘지 모를 사진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의 어떤 유물이든 반드시 그것만의 느낌을 잡아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것은 객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함이다. 문화란 평론가나 전문가가 말하는 어떤 객관적인 이해도 필요하지만 개개인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을 때,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극락전을 내려오는데 극락전 외벽이 참 독특하다. 대웅전으로 들어올 때는 석축을 중심으로 상승하는 느낌이었는데 극락전에서 내려갈 때에는 돌이 어느 한 지점에서 비스듬히 경사지게 해 놓아 하강하는 느낌이다. 왠지 구경이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범부의 세계로 다시 내려가는 길이라 그런가보다. 흐흣.
3.
제대로 보고 왔는지 모르겠다. 나름대로 책 읽어가며 특징을 잡아내고 알아보려고 노력했는데 뭔가 다른 게 있을 것도 같다. 이제 부지런히 석굴암을 향해 걸어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