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의 위기는 늘 삶의 위기다. 두 명의 어민이 기름투성이로 변한 바다와 삶을 비관해 목숨을 끊었다. 또 한 명의 어민이 심상정 민주노동당 대표의 연설을 중단시키고 분신을 시도했다. 왜 그는 사회주의자 심상정 동지 앞에서 목숨을 내던지려 했을까? 지금 바다도 죽었고 어민도 죽고 있다고, 그러니 사회주의자들은 정신 차리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들은 정신 차려야 한다. 이 비극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요컨대 바다도 살리고 어민도 살릴 수 있는 방책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무엇을 해야 할까?
바다에서 기름때를 벗겨내는 것도 필요하다. 사고 책임자로 지목되고 있는 삼성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어민 생계를 위한 특별법도 필요하다. 그리고 어민들의 투쟁에 함께 어깨 거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미 직감하고 있듯이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우리는 그동안 이 같은 일을 늘 해 왔다.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상암동 홈에버 매장에서, 덕적도와 동강과 부안에서 늘 삶의 환경과 삶을 지키는 반대운동을 줄기차게 벌여왔다. 때론 성공하기도 했고 때론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진 못했다.
태안어민과의 연대 운동에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해선 안 된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다. 둘째 이 싸움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과 악수하기를 바란다. 또한 민주노동당이 태안 어민들의 삶과 연대하고 그 삶 속에 뿌리내리길 바란다.
민주노동당에 이번 싸움은 빼앗긴 무기, "생태주의"를 되찾아와 민중의 삶을 지키고 변화시킬 무기로 다듬는 과정이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집권으로 끝나고만 한국의 불행한 민주주의를 민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무기로 벼리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민주노동당의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
생태주의를 가슴에!
정치는 늘 포지셔닝의 기술이다. 입장은 위치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주의’를 심장에 새겼다. 그러자 한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깃발로 삼았다. 이것이 '미국에 환장하는 보수주의'와 '민족에 열광하는 자유주의'의 탄생 과정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한 한국 지식인들은 외국의 보수주의는 애국주의의 심장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보편주의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의 관찰은 옳았다. 그러나 정치의 비밀에는 무지한 지적이었다.
민주노동당,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이 정치세력의 가슴엔 무엇이 새겨져 있을까? ‘자주파’의 4년동안 민주노동당은 '열혈'민족주의의 깃발을 들었다. 북한, 미국 문제만 나오면 소위 ‘범여권’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소리를 그저 과격하게만 발음했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삶의 민주주의"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생활 속 진보"가 아니라 생활 자체의 진보, 즉 삶의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정치를 제시해야 할 때다.
둘째 민주노동당은 생태주의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숱한 필자들이 주장했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만 첨언하겠다. 이른바 환경이라는 것이 내겐 ‘자연’이 아니다. 환경은 삶의 환경이며 환경의 위기는 궁극적으로 삶의 위기이다.
생태주의여! 삶을 껴안아라
한국 생태주의 운동은 주로 도시 거주자들 특히 서울 거주 중산층의 운동에 머물고 말았다. 이들은 개발주의와 구분되는 패러다임의 단초를 제시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지역주민들의 "삶의 민주주의"를 심화하는 데 기여하지 못하였고 결국 활력을 잃고 말았다.
한국에서 국가가 개발주의를 내세워 주민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앞장 서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강댐 반대운동에서도 그것은 여실히 드러났다.
필자는 1999년 [관악문화]에 실린 “동강댐 반대운동의 빛과 그림자”라는 글에서 서울의 중산층 환경운동단체가 동강지역 주민공동체의 복원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동강댐 반대운동이 농촌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결국 동강댐 반대운동이 내건 환경과 주민 공동체를 보호하자는 목표도 좌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농촌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형편 없는 농촌 주민들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떠나려 할 것이고 결국 국가의 개발주의에 맞선 지역주민들의 싸움은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동강에 댐은 들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동강은 레프팅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것을 개발주의를 대체한 '환경관광주의'라고 불러야 할까? 결국 농촌의 삶을 바꾸는 정치는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때 지적의 핵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난 대화 상대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했다. 그것은 실수였다. 서울의 생태주의자들에게 그걸 요구할 순 없었다.
지역주민들의 공동체를 지키고 농촌의 삶을 바꾸는 것은 생태주의를 가슴에 새긴 사회주의자들의 몫이었다. 문제는 동강에는 그런 사회주의자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개발주의 외에 다른 삶의 대안을 본 적이 없는 경주 시민들은 세계문화유산 경주에 핵 폐기장을 유치하였다. 그렇게 삶의 환경을 위협에 빠뜨리고 결국 주민 스스로의 삶도 위협에 빠뜨렸다.
이것은 서울의 중산층 생태주의자들의 자연보호 운동이 개발주의와 다른 삶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명백히 실패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환경운동가들의 기반인 서울에서도 개발주의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 환경운동연합의 생태주의는 이명박-오세훈의 환경주의로 할인 판매되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의 쇠퇴 과정이다. 뒤늦게 생태주의를 가슴에 새기려는 사회주의자들은 이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살아 있는 정치를 위하여
물론 서울의 환경시민운동과 연대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서울과 시골의 삶의 차이가 천양지차인 대한민국에서 지역주민들의 자발적인 반대운동이 지역주민의 삶을 바꾸는 실질적인 대안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주민들은 핵폐기장을 유치하거나 관광객을 유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지역에서 삶의 환경과 삶을 지키면서 이를 개선시켜갈 것인가? 너무도 당연하게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그 주체다. 서울에 사는 생태주의자들도 공장의 사회주의자들도 주체들은 아니다.
주민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운명을 저울질 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 광역자치단체, 지역구 국회의원 등의 모든 자리를 탈환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수정당의 죽은 정치를 “살아 있는 정치”, “삶과 삶의 환경을 바꾸는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제출해야 할 증빙서류 더미들과 복잡한 보상절차에 삶을 내어 맡겨서는 안 된다. 영악한 보험회사, 무책임한 사고책임자 재벌기업, 이 와중에도 표 계산에 분주한 보수정당에게 삶을 결정할 권리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민주노동당은 지역주민들 스스로가 자신의 공동체를 꾸리고 그 에너지를 모아 "삶을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꾸는 일"에 나서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니 심상정 동지! 태안어민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하라! 그것만이 죽어라 반대운동을 벌였는데도 삶을 바꾸지 못했던 그간의 오류를 근본적으로 시정하는 길이다.
그것만이 한국 생태주의 운동의 추락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면서 동지를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회주의자의 뒤늦은 자기반성이다. 해묵은 논쟁으로 민중의 삶을 방어하지도 못하고 결국 죽음을 방관해온 사회주의자로서의 마땅한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