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이 떠졌다. 뭔가 열심히 꿈을 꾸던 것 같다가, 7시가 된 줄 알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참, 별 짓 다하는구나.
잠도 오지 않아, 차를 슬슬 몰아 새벽예배에 갔다.
이상한 날이다.
1.
장로님 내외분, 목사님 내외분, 나.
우리 목사님의 영원한 레파토리, 우상은 바로 돈이다.
나는 우리 목사님의 저 레파토리가 좋다.
작지만 나는 이 날, 예배의 공기가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작지만 진실할 수 있는 예배.
2.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신다. 위로는 상한 마음일 때, 진정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마음 속이 휘휘 돌아 혼란스러울 때였다. 울화가 치밀어 올라 우울하기 짝이 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을 때였다.
아빠가 취직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막연히 나는 기도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실제로 기도하지는 못했었다. 항암치료를 받는 아빠가,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냐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가 다니는 탁구장에서 청소를 하면서 2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항암치료 받으면서 다녀도 된다고 했다고, 다음 달부터 할 수 있겠다고 한다.
나는 그저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릿 속에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고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빠의 일을 통해 나는 내 고민을 나만 싸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을 좁히고 좁혀, 여유가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안고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민할 수 있었고, 그 고민은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 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더 유연하게 고민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엉켜있던 실타래의 가장 끝부분을 찾은 기분이었다. 나는 좀 더 마음을 넓히고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내 고민을 지켜보는 이가 있으므로, 더 그럴 수 있었다.
하나님의 위로는 "내가 여기에 있다." 라는 뜻이었다.
그 후, 나는 고민하던 바를 주변 이들과 나누고 공감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를 고민하게 만든 원인에는 나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고, 내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것 역시 '위로'였다. 내가 받은 위로를,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로의 힘으로 다른 이의 말을 듣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내가 모르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 그래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좁아진 마음으로, 잊고 있었다.
엉켜진 실타래가 슬슬 풀리고 있다. 조금 더 힘을 내보자.
3.
어제의 일.
기도하던 중, 나는 예수께서 뭇 사람들을 고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의 아픈 것을 말하고 자기를 고쳐달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는 그들이 고침을 받았지만 결국 자기를 모를 것이고,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며 혹은 예수의 고침을 잊고 살아갈 것을 아셨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한가, 그것은 상처이고 배신감이다.
나 같았으면 집중추궁하며 그 사람들을 고치는 일을 미친듯이 억울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치셨고, 그들이 다시 세상 속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셨다.
그를 기억조차 못하는, 그를 통해 고침받은 이들을 위해서.
그에 비한다면 내 오만원은 얼마나 치사한 양인가.
큰 손해도 아니고, 큰 선행도 아니다.
그저 슬펐던 그 마음 그대로, 그냥 그 오만원은 내가 겪은 슬픈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그렇다.
간 밤에 억울하고 슬픈 마음을 품었던 내가 부끄러워 울었다.
다 큰 것처럼, 마음 넓은 것처럼 굴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좁고, 나는 아직 어리기 짝이 없다. 이기적이다. 예수의 죽음을 마음에 새기며 살자고 말만 떠드는 어린애에 불과했다.
정말, 그 죽음이 내 마음에 새겨졌는가. 말이 아닌 가슴 깊이 박힌 십자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에 나는 부끄러워 울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어린 나에게 예수의 마음을 알게 해 준 것, 그것은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