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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철수사용설명서

by bravoey 2011. 7. 22.




세장쯤 읽었을 때였을 것이다. 제길, 잘 썼네. 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 문체는 더 없이 간결하고 핵심적이다. 당연하다. 사용설명서에 형용사나 부사는 필요없다. 철수는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자, 보편적인 인물로 설정되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쓰려고 사용설명서를 수도 없이 구해 읽었다던데, 문장은 그 느낌을 잘 살려냈다.

철수에 대해 알아갈수록 슬퍼지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건 바로 아래의 문장을 접했을 때다.



가끔씩 철수는 사람들이 망가진 제품을 만나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은 상대적으로 정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58p)




철수의 행동이 우스꽝스러워 질 때마다 마음으로 안도하는 나 자신을 봤으니까. 그래, 철수 같은 사람 세상에 많지. 바보같이, 나 자신이 철수 같다는 사실은 발견하지 못한 채 말이다. 오래걸리지 않는다. 곧 발견된다. 철수의 어설픈 모습이, 타인에 의해 비춰지는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 또한 타인에 의해 곡예를 타며 살고 있지 않은가. 사용설명서라도 쓰는 철수는 그나마 낫다. 사용설명서는 철수의 강한 의지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자기를 인정하려는 강한 의지.



그리고 철수는, 과연 철수는, 철수를 선택했을까. - 147p



문득 설명서를 써내려가는 철수의 마음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수의 시선이 타자를 향해있다가 이제 자신에게로 옮겨간다. 사용하는 방법이 마무리 되는 장이다. 이제 관리와 주의로 넘어가는 순간인데, 철수의 시선이 드디어 철수에게 돌아왔다. 관리와 주의사항에서 철수는 자기를 들여다본다.



철수는 조금 더 자두려고 눈을 감다가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 한 사람이라는 것을 - 221p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규정하는 방법으로 타인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그들과의 관계, 대화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정해간다. 하지만 아니다. 자기를 규정하는 것은 결코 타인이 될 수 없다. 타인들은 너무나 많고, 다양하며, 편협하기도 하다. 자기는 오직 자기 자신만이 규정할 수 있다. 자기가 규정한대로 삶은 살아진다. 철수가 자기를 불량품, 더 나아져야 할 제품으로 규정한 순간부터 철수의 삶은 모든 게 불량이었고 철수는 오로지 불량딱지를 벗어나기 위해 살았던 것처럼.


유리컵을 바닥에 던져버릴 일이다. 다른 이는 미친 짓으로 보일지 몰라도 자기에게는 절실한 행동 하나가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자기에게 시선을 돌리는 일이, 타인의 시선을 벗는 일이 미친 짓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라질네이션' 이 곳. 우라질 청춘 철수. 그 같은 나.


책을 덮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석순 작가는 다음 작품 쓰기가 조금은 힘들지 않을까. 이것보다 더 나은 작품이거나 이것만큼의 기대를 하고 있을텐데. 남걱정이나 하고 내 걱정이나 해야할텐데. 나는 언제쯤 반짝 빛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