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명 : 만세
출산일 : 2013.9.13
출산한 곳 : 메디***
우아하게 자연출산을 하겠다던 상상과는 달리 짐승처럼 울부짖다 아기를 낳아버린 지금, 우아한 출산을 하려면 정말 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저는 약 50일 전에 우리 만세를 출산했어요. 자연출산을 결심한 것은 <농부와 산과의사>라는 책을 접한 뒤였어요. 자연출산의 가장 큰 매력은 내 아이에게 '평화로움'을 첫 선물로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내 몸에 가장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남편과 함께 출산교육, 리허설, 모유수유 교육까지 열심히 쫓아다니며 출산준비를 했습니다.
자연출산은 정말 특별하고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연출산으로 낳은 아이가 다른 방법으로 출산한 아이들보다 더 낫고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은 모두 소중한 생명이고 다양한 미래를 지니고 나오니까요. 다만 자연출산과정을 통해 엄마의 몸에 대해, 아기의 몸과 탄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고, 부모를 모두 성장시키는 좋은 경험이기에 특별하고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나중에 아이가 다른 이에게 혹은 자기 아내에게 “우리 엄마는 나를 자연출산 방법으로 낳았는데, 엄마에게 참 감사해.”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해요. 아이에게 자부심이 되었으면 해요. 제가 자부심을 느끼는 것 처럼요.^^
좀 길지만 혹 자연출산을 하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까해서 올려봅니다.
9월 13일, 드디어 이슬이
원래 예정일은 9월 7일이었다. 그 날 정기검진이 있어서 서울 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갔고, 1주일 안으로는 나올 것 같다는 정원장님의 말을 듣고 돌아왔다. 예정일보다 늦게 출산하는 것, 진짜 스트레스다. 여기저기서 전화는 오고, 애가 클 거라는 둥, 유도를 하면 된다는 둥 하는데 은근히 짜증이 났다. 서울로 낳으러 가는 것도 주변에 말해두지 않았던터라 이리저리 둘러대는 것도 곤란하기도 했다. 하루하루 화장실 갈 때마다 기대를 했지만 만세는 5일이나 엄마아빠를 긴장하게 하고는 세상에 나올 준비를 시작했다.
밤에 남편과 영화 <관상>을 보고 - 마지막 영화가 될지도 ㅜ.ㅜ - 집에 돌아와 만세가 언제나 나올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토요일까지도 만세가 나올 생각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잠들었던 것 같다. 새벽에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고 생리통처럼 허리가 알싸하게 아파 일어나 짐볼을 슬슬 타고 있는데, 화장실에서 드디어 이슬을 봤다. 옅은 피가 휴지에 묻어났고 순간 긴장과 기대, 기쁨이 같이 밀려왔다. 신랑에게 이슬이 비쳤다고 알리고 메디 핫라인에 연락하니 진통간격이 10분이면 다시 연락 달라고 했다.
진통간격은 금방 10분으로 당겨졌다. 뭔가 빨리 진행되는 듯 했다. 10분 간격이 두 시간만에 8분 정도로 바뀌었고,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출산가방이랑 간식 등을 챙겼다. 좀 자려던 신랑은 도저히 잠이 안 온다며 라면을 사러 출동했다. 임신기간 내내 제일 먹고 싶던 게 라면이었는데 안 먹고 버티다가 이때 먹겠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 새벽 2시에 신나게 라면을 끓여먹고 잠을 청해보다가 진통간격이 자꾸 빨라져 새벽 6시에 부랴부랴 출발했다. 차 안에서 2시간 반, 그리 진통이 세지 않아 대전에서 서울까지는 수월하게 갔다. 졸다가 진통하다를 반복하며 그렇게 메디에 도착. 도착해서도 난 웃고 있었다. 설레고 떨렸다. 내진을 하니 4cm가 열려있어서 잠시 5층 한방병원에 입원을 했다. 신랑은 긴장이 풀렸는지 이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다. 자두길 잘했지, 이 때도 안 잤으면 큰일날 뻔했다.
세상 고통의 기준이 된 진통 그리고 엄마
오전 10시 반이 넘어서자 진통은 서 있기도 힘들게 찾아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이 때의 진통은 그래도 호흡으로 넘길만 했다. 신랑이 점심밥을 가져왔고, 진통을 넘겨가며 밥을 먹었다. 이 때 안 먹었으면 죽을 뻔했다. 밥을 다 먹고 신랑이 내려다 놓겠다고 가는데 이젠 어떻게 몸을 가누지도 못하게 진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5분 간격도 채 되지 않았다. 뭔가 진통이 본격적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어쩌지를 못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신음만 터져나왔다.
메디로 입원실을 옮기고 나서가 오후 2시쯤이었는데, 이 때부터 내 기억에 거의 눈을 못 뜨고 있었다. 호흡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고 거의 OTL 자세에서 꼼짝을 못하고 5시간을 있었다. 신랑은 엉덩이 마사지를 하며 호흡을 유도했지만 이미 짐승단계에 접어든 나는 신랑 손을 부여잡고 어흐흐흑 대기에 바빴다. 허리와 배에 밀어닥치는 고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호흡을 하다가도 파도가 밀어닥치니 짐승신음소리만 터져나오고. 조산사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호흡을 도왔지만 나는 되지 않는다고 우는 소리만 냈다.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떨어졌고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자세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호흡을 못하자 둘라를 부르겠냐는 조산사 샘 말에 나는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조산사 샘은 내가 짐승소리를 내는 현장에서 둘라를 부르고, 상담전화도 받으셨다.
진통을 하는 동안 내 머리 속에는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도대체 언제 애가 나오는걸까, 이 진통은 언제까지 해야하는걸까. 두려움과 외로움이 가장 컸다. 밀려오는 진통이 너무 두려웠고, 이 진통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게 너무 외로웠다. 물론 신랑이 옆에서 마사지에 격려에 애끓어 하는 통에 힘이 되었지만 출산은 어디까지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날 이렇게 아프게 낳았구나, 그런 것도 모르고 나 잘났다고 엄마 무시하고 살았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엄마한테 미안했다.
창 밖이 어둑해질 무렵, 자꾸 엉덩이 쪽으로 힘이 들어갔다. 조산사 샘에게 자꾸 응꼬에 힘이 들어간다고 하자 생각보다 진도가 빨리 나가는 것 같다며 둘라 샘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지금 오셔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아 아직 도착 안했으면 취소하겠다며 통화를 했고, 거의 다 도착한 둘라샘을 돌려보냈다. 단언컨대, 진통은 응꼬에 힘들어가면서 시작이다. 출산의자에 앉아 힘을 주는데 사정없이 힘을 줘대는 바람에 조산사 샘이 나중에는 산모님 마음대로 힘 줘보시라고 할 정도였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이 힘이 들어가서 정말 으으으악 소리를 내며 똥꼬에 힘을 줬더니 거기가 아니라면서 어딘가를 찍어주셨고 그 쪽으로 힘을 넣어보고자 애썼다. 자세를 바꿔보자며 태동검사를 할테니 누워보라고 했지만 나는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어 못하겠다고 우는 소리로 말했고 다시 OTL 자세로 진통. 내 몸에 이렇게 많은 땀이 있는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중간에 내진을 한 번 더 했고 이제 다 열렸다며 침대에 눕고 출산 자세에 들어갔다. 이제 다 열렸다는 말이 얼마나 기뻤는지 꼼짝도 못하던 내가 세상에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그렇게 힘주기를 하고 애기 머리가 보인다는 말에 이제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힘을 냈고,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싶은 그 때, 조산사가 신랑에게 아기 머리 보이시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랑이 뭐라고 답했는데 기억은 잘 안난다. 오로지 빨리 끝내버리겠다는 생각 뿐. 절박한 심정으로 힘을 줘 대던 어느 순간 고통이 거짓말 처럼 사라지고 뭔가 뜨겁고 물컹한 것이 나오는 느낌이 났다. 사진촬영이니 뭐니 할 틈도 없었다. 신랑은 아기를 받고 내 이름을 불렀고, 내 어깨 위에 우리 만세가 작은 소리로 울며 꼬물꼬물 거리는 걸 느끼는 순간 내가 막 웃으며 어머어머를 연발했다. 신랑은 눈물을 흘리려다 내가 웃는 걸 보고 사람이 저렇게 한 순간에 변하는가 싶었다고 했다.
아이를 안는 순간의 그 희열과 기쁨은 저녁노을 같은 빛깔이었다. 하루의 마지막으로 간다는 신호이자, 내일을 알리는 새벽 태양빛을 닮은 그 저녁노을. 내가 생명을 낳았다는 사실이 감격 그 자체였다. 아이를 안고 있는 동안 후처치가 들어갔고 마구잡이로 힘주던 나는 회음부 처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기쁨의 호르몬 덕분인지 아픈 줄도 모르고 잠만 자는 만세를 보며 신랑과 출산과정을 얘기하며 밤 늦게야 잠이 들었다. 신랑이 둘째 얘기 꺼내길래 애 안 낳을거니까 낳으려면 네가 낳아라! 고 했다.
부모님들에게 서울에서 출산했다는 소식을 알리니 다들 놀라시고, 형제들에게 지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엄마가 나 이렇게 힘들게 낳은 거 나 이제 알겠다고, 그동안 잘났다고 엄마한테 잔소리하고 까불었던 거 정말 미안했다고 말했다. 엄마는 오히려 출산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한테 더 미안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잠을 설치기도 했다.
출산 후
출산 후 2-3주간은 정말 힘든 시기였다. 아기가 나온 뒤부터 겪는 몸의 불편함은 산후우울증을 불러오기 딱이다. 매일 쏟아지는 오로와 회음부 불편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고통, 때 되면 아기에게 젖 물려야 하는 피곤함은 신경을 바짝 곤두서게 만들었다. 출산의 고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배가 조금만 아파도 스트레스가 훅 밀려왔다.
토요일 점심 때 퇴원하고 불편한 자세로 대전에 도착했고 집에 와서는 아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 줄 몰라 신랑이랑 둘이서 끙끙대야 했다. 신랑은 몸 불편한 나 돌보랴, 밥 차리고 치우고 청소하고 애기 보느라 정신을 놓을 정도였다. 남자들의 출산휴가는 주말이라고 해도 그 기간도 휴가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금요일에 출산했으면 그 날 연차를 내고 다음 월요일부터 출산휴가를 내야 했는데 신랑이 미처 몰라 금요일부터 쭉 출산휴가를 쓴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월요일부터 이모가 출근했지만 주말부터 시작된 내 산후우울증 때문에 신랑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월요일 이모가 퇴근하고 바로 신랑에게 전화해 울었다는. 빨리 오라고 말이다. 신랑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퇴근하고 화요일 연차를 냈다. 추석연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든 신랑과 연휴주말 5일을 함께 보내며 유두혼동하는 아기와 싸우고, 산후우울증도 신랑의 다독임으로 잘 보낼 수 있었다.
산후조리기간에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왜 조리원에 안갔냐와 지금 몸조리 못하면 평생 고생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이 말이 마치 협박처럼 들렸다. 너도 고생 좀 할거다, 라는 식으로 들린 적도 있다. 산후조리의 주적은 스트레스라는데, 몸조리 잘 하라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산후조리의 적이 바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의외로 많았다.ㅜㅜ)
뭐, 어쨌든 조리원 안가고 도우미 이모와 아이와 함께 즐겁게 3주를 잘 쉬었다. 낮엔 이모님이 집안일 해주시고 밥과 간식 챙겨주셨고 간간히 티브이 보며, 자며 안정을 찾았다. 저녁엔 신랑이 와서 남은 집안일과 아기보기를 해줘서 밤잠 못자 피곤한 적은 별로 없었다. 마지막 4주차를 친정에서 맛있는 것 잔뜩 먹고 엄마와 함께 보냈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몸은 따뜻하게,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자고 생각하며 한 달을 보내고 나니 몸이 많이 나았구나 생각이 들었고, 지금까지 집안일 슬슬하면서 재미난 텔레비전 프로그램, 만화책 보면서 지내고 있다. 직장생활을 10년이나 했던터라 처음엔 이 생활이 너무 답답했는데 사람 몸 참 간사한게 이제 집에 있는게 편하다. 어쨌든 내 급여 꼬박꼬박 나오는 세달은 아무 생각없이 먹고 놀고 애나 보자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유두혼동 때문에 한 이틀 힘들었지만 모유수유도 젖몸살이나 유두 아픔 없이 잘 해내갔다. 병원에서 열심히 젖을 물려서 그런지 집에 와서 이틀동안 젖이 안돌았는데도 애가 잘 빨았다. 꼭 젖을 빨리고 나서 분유를 조금씩 손가락 수유를 해서 먹였다. 주말 지나고 도우미 이모가 오셔서 애기 뱃고래 키운다고 젖 물리고 나면 분유를 더 타서 젖병으로 먹이셨는데 많이 먹을 때는 80까지도 먹어서 모유수유 못하게 되는 건 아닌가 맘을 졸였다. 이모님께 분유나 젖병 쓰지 말라고 얘기할까 했는데, 먹고나면 몇시간이고 자니 내 몸 생각하자는 유혹에 망설이기만 했다. (다행인지 황달은 패스함)
그러나 추석연휴에 만세가 6일차 되던 때 유두혼동이 와서 젖을 안 물려고 했다. 자세도 바꿔보고 여러모로 해봐도 애가 울기만 하고 먹질 않아 분유를 먹였는데, 때마침 방문했던 작은 형님(둘째애 2살인데 아직도 모유먹이심)이 보시더니 “방법은 없어, 엄마가 이겨야돼.” 한마디에 힘을 얻어 애 막 울어도 안 주고 젖 땡겨서 물리고 싸우고 이틀만에 엄마에게 항복했다. 정말 이거 하나 해내고 나니 갑자기 육아가 자신있어지더라는.^^; 신랑에게 울며 분유랑 젖병 다 치우라고 명하고, 손가락 수유통만 혹시나 해서 남겨놓았다. 다행히 그 후로 젖병 쓸 일은 없었고 지금까지 직수하고 있다.
지금은 담영이가 된 만세와 50일이 다 되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아직 담영이는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하고 있지만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도록 도와야 할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무겁다. 더불어 이 아이와 함께 할 내 삶에 대한 고민도 놓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엄마란 아이에게 헌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커가는 사람이다. 함께 커가는 입장에서 아이의 밑거름을 잘 만들어주면서 그 밑거름으로 내 삶을 키워내기도 해야한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갈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고 싶다. 적어도 30년은 가야할 한 아이의 삶 앞에서 내 삶 또한 깨어있어야 함을 느낀다. 내 아이가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한 인격이다. 그 무겁고도 경이로운 사실이 내가 아닌 남편과 나, 우리라는 이름의 시작이자 행복 그 자체임을 느낀다.
고작 50일간의 육아지만, 이만큼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는 어쩌나 앞이 깜깜하지만 배시시 웃는 담영이의 웃음에 매일 파워업하며 보낸다. 그래, 지금은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