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취생활만 10년째 하고 있다. 이사를 많이 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자취집이 있다. 평범한 원룸이었는데, 베란다로 나가면 원룸 뒤쪽에 공터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공터는 말 그대로 그냥 아무 것도 없는 맨 땅이었다.
봄이었다. 무심히 바라본 그 공터에서는 새파랗게 젊은 싹들이 맨 땅 위로 힘차게 손을 뻗고 있었다. 여름이 되면서 그것들은 옥수수로, 파로, 무와 고추로 아무 것도 없던 땅을 가득 채웠다. 그 과정을 매일 보던 나는 인생 스물 여덟 살면서 처음으로 ‘신기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건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느낌이었다.
온통 새파란 그 곳에서 하나님의 숨소리가 들렸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다듬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식물이 자라도록 하는 힘은 그 분이 지으신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햇빛과 땅 속에 흐르는 생명력, 바람, 공기, 이 모든 것이 그것들을 자라게 하고 그렇게 자라난 것들로 인해 사람이 먹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늘 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서 자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보편적으로 말이다.
땅 속 미세한 생명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낸 착한 새싹과 그 열매들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그의 속삭임이었다. 눈을 돌려 본 세상에는 언제나 한결같은 아침과 저녁노을이 있었고, 어디가지 않고 든든히 그곳에 있는 산과 철새들이 쉴 수 있도록 늘 흐르는 하천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가 만든 세상은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가 믿는 그 분은 내가 사는 세상, 나의 일상에서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바꾼 것은 그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은 자연의 흐름인 밀물과 썰물을 시멘트로 막아버리고, 사람의 삶 가장 가까이에서 숨 쉬는 강의 흐름을 틀어버리고, 지구를 점점 뜨겁게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우리가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산을 뚫고 다리를 놓는다. 도로에 넘쳐나는 동물시체들을 보고 이제는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는다. 사람은 세상을 바꾸며 속도와 돈을 얻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 사람에게 맨땅에 꽃이 피는 일이, 살갗에 스치는 바람이 주는 감동은 없다. 지금의 세상 너머의 원래 세상은 보이지 않고, 원래 세상 속 넘치는 하나님의 숨소리를 점점 듣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세상과 우리를 분리시키면서 우리가 더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다. 단호히 말하건데, 그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 속에서, 맨 땅에 흐르는 생명에 대해, 배반하지 않고 흐르는 강물에 대해, 그 속을 살아가는 작은 뭇생명에게서 하나님의 숨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더 깊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연의 흐름인 밀물과 썰물을 시멘트로 막아버리고, 사람의 삶 가장 가까이에서 숨 쉬는 강의 흐름을 틀어버리고, 지구를 점점 뜨겁게 만들고 우리가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산을 뚫고 다리를 놓는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완벽히 거스르는, 우상(돈)에 대한 숭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래 모습과 사람에 의해 변해버린 세상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지금의 세상’은 결코 우리와 분리되지 않았다. 더더욱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우리는 예수도 믿으니 인생이 얼마나 퍽퍽한가!
그래도 우리의 퍽퍽한 인생 틈 사이로 뜨뜻하게 흘러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세상을 지으신 그 분이 내 손에 쥔 돈 만원처럼 구체적으로 우리 일상 속에 살아계심을 매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 사실을 좀 더 제대로 느끼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알리기를 바란다.
당신이 사는 세상에 바로 하나님이 있다. 당신이 빌려쓰는 세상 곳곳에 버젓이 보이는 하나님을 이제는 정면으로 보시라. 당신의 일상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더 깊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느껴라. 그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진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