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短刀

아, 슬퍼

by bravoey 2011. 11. 25.
농담도 하고 술도 마시고 손도 잡고 그러다 점점 서로 매력을 느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데. 그런데 진보 정당의 방식은 이런 식이야.
처음 만난 상대 앞에 재무 계획서와 신혼방 설계도를 떡 꺼내놔. 그리고
입주할 주택의 입지 조건과 구입할 차량의 대출 조건 및 주변 교육 환경의
우수성에 대해 부동산과 금융, 교육 전문 용어를 섞어 진지하게 프리젠테이션하지.
그런 다음 건조한 표정으로 바로 결혼하재. 만약 나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속물이라 더 큰 집과 더 큰 자동차에 넘어간 방증이라며.

그걸 당한 상대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당신 패션부터
좀 후즐근한 것이 촌스러운 데다, 자료는 열심히 준비는 한 것 같지만
뭔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고, 결정적으로 내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게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냐며 일어나 떠나버려.
남겨진 진보 군은 자기 프로포즈가 실패한 요인을 열심히 분석하다가
입지 조건과 대출 조건의 우수성을 다른 경쟁자들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혼자 결론 내리지. 그렇게 연애 한번
못해봤으면서 꼭 결혼할 거라고 혼자 다짐을 하지. 20년 후에. 아. 슬퍼.

더 슬픈 건 뭐냐. 욕심 많고 잇속 빠른 보수 군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진보 군이 책상 위에 남기고 간 계획서와 설계도를 집어 와서는
표지만 엄청 화려하게 바꾸고 총천연색 컬러로 인쇄해서, 자리를 박차고
떠난 국민 양을 찾아가 계획서를 다시 내놓는다는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은
읽어주지 않아. 휘리릭 페이지만 넘기면서 대신 장미 한 송이 안겨주고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서 엄청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시키지.
그들은 그렇게 연애를 시작해버리네. 그런데 레스토랑에서 나올 때에야
국민 양은 알게 되지. 그 장미는 플라스틱이고 그 밦값은 자기가 내는 거였다는 걸.

- 김어준, <닥치고 정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