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철거민 5명이 한번에 죽었다. 불에 타 죽었다. 불길을 피해 건물 4층에서 떨어진 이는 중태다. 철거민들의 농성을 진압하던 경찰 특공대 1명도 죽었다.

2009년 1월 20일, 우리는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학살을 목격했다. 철거민들이 옥탑 철탑 옥쇄농성에 돌입한지 겨우 25시간만이었다. 대화로 설득하려는 노력도 포기한 채 새벽 6시, 적을 상대하는 전쟁처럼 군사작전을 펼쳤다. 테러와 같은 중대한 범죄에 투입되어야 할 경찰특공대가 겨우 30여 명 남짓의 철거민들을 진압하는데 투입되었다. 그 작전을 승인한 이는 촛불에 대한 강경진압을 주도했던 현 서울경찰청장이고,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서 차기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이다.

속전속결로 철거민들을 해산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을까. 분명히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을 인지하였던 경찰이었는데, 경찰 지휘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부하들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사지로 내몰았다. 아무런 안전장비도 없는 채. 그렇게 그들은 죽어갔다. 한쪽은 생존권을 위해 마지막 올랐던 망루에서, 한쪽은 생존의 비명소리를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몰염치한 저들

사람이 한 번에 6명이나 죽은 참사가 빚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내노라하는 이들이나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합법적인 조치임을 강조하고, 청와대 김은혜 부대변인은 이번 기회에 과격시위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공식 브리핑으로 냈다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신지호 의원은 전철연은 반국가단체라면서 이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을 옹호하고 나섰다.

뿐만인가? 신원 확인도 없이, 유가족들에게 통보도 없이, 검찰은 일방적으로 불에 타버린 시신을 부검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확인하자고 요구해도 경찰은 가로막았다. 그 참혹한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들, 2009년 새해는 이렇게 잔인한 폭력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잔인하게 일깨워주면서 시작하고 있다. 올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폭력 앞에 떨고, 울어야 할까. 참으로 걱정스럽다.

미국에서는 '버럭 오바마'라는 흑인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했다. 그는 미국이 겪고 있는 위기를 직시하자면서 솔직하게 위기상황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번 위기가) 시장을 제대로 감시하지 않을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 수 있으며, 오로지 부유한 자들만을 위하면 국가는 장기간 번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삼 일깨워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가려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오바마는 뚜벅뚜벅 걸어갈 것임을 선언했다.

지난 연말과 연초 '입법전쟁'을 치룬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다시 2라운드를 준비한다. 연말연초와 같은, 법안을 무더기로 날치기 처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 오고 있다. 2월 임시국회에서 다시 민주당이 지난번처럼 강경하게 반민주, 반인권 악법을 저지하기 위한 강경투쟁에 나설 것인지, 언론노조와 같은 힘이 동원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간 KBS 이병순 사장은 자신의 취임을 반대했던 사원행동 간부들을 중징계하여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KBS노조마저 투쟁에 나서게끔 몰아세우고 있다. YTN도 마찬가지다. 낙하산 사장들이 하는 짓이 이 모양이다. 정부의 나팔수로 적극적으로 나서려는 이들 때문에 언론노조의 동력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영희 장관도 노동계를 불붙게 하고 있다. 말로만 하던 비정규직 기간연장 법안을 2월 임시국회에 제출하겠다고 공언했다. 노동계는 당연히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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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kojiwon.com BlogIcon 늦달 2009.01.24 00:38 신고

    없이 사는 사람은 MB 눈에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겠지요.
    이 야만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가햐는 것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의 글>

만수보다 더 정확한 예측으로 인기를 끌었던 미네르바가 30대의 백수라고 하네요. 검찰의 발표를 믿는다면, 어느 30대 백수의 경제 예측이 한나라의 경제수장보다 더 정확했다는 얘기가 되지요. 한 마디로 기는 만수 위에 뛰는 백수가 있다는 것이 이 나라의 현재 상태가 아닐까 합니다. 어쨌든 지하 벙커에 비상상황실 차려놓고 처음 선보인 작품이 고작 '미네르바 긴급체포'라니, 전 세계에서 웃을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 살린답시고 전쟁상황실 차려놓고 일개 네티즌에게 선전포고나 하고 있으니....

미네르바가 구사한 용어들이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쓰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나, 사실 전문가 뺨치는 아마추어가 넘치는 곳이 또한 인터넷이지요. 외려 언론에서 추측하던 그런 프로필을 가진 사람이 정부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 외려 비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정체를 놓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 의심의 바탕에는 학벌주의 코드가 깔려 있는 것 같아 좀 불편합니다.) 역시 사건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경제 예측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요. 한때는 그의 예측이 틀렸다는 이유로 잡아넣겠다고 하더니, 그게 여의치 않자 이번에는 허위사실 유포로 걸어 버렸네요. 국회에서 장관이 사법처리 가능성을 운운한 이후로, 미네르바가 평정심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한 동안 그가 쓴 것이라고 믿기 힘든 격앙된 글들을 올리더니, 결국 결정적인 실수를 했지요. 하지만 본인이 그 실수를 인정하고 글을 삭제하고 사과까지 했는데도 '긴급체포'를 당하는 게 이 나라의 상황입니다.

이번 사건은 앞으로 인터넷 모욕죄가 도입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미리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사례입니다. 고소, 고발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검찰에서 선제적으로 수사를 들어갔습니다.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모아 뜯어보면, 그 중에서 몇 가지 크고 작은 실수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것만으로도 '긴급체포'되고, 구속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정부, 여당, 여당 의원들에 대해 입을 벙긋거렸다가는 긴급체포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완전 전체주의 경찰국가의 상황이 되는 거죠.

미네르바의 글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이 있나요? 미네르바의 글 때문에 피해를 본 투자자가 있나요? 미네르바의 글 때문에 모욕 당하고, 명예를 훼손당한 시민이 있나요? 없습니다. 사이버 모욕죄가 누구를 보호하는 법인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법이 도입되면, 앞으로 미네르바 긴급체포와 같은 사태는 아마도 인터넷의 일상이 될 겁니다. 청와대 비판한 누구 긴급체포... 재경부 비판한 누구 긴급체포... 긴급체포, 긴급체포, 긴급체포..... 민심이 정권에게 시민들 입 막는 것만큼 '긴급'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워룸 차려놓았다가 비아냥이나 듣자, 공간이 없어서 그런다는 둥, 그쪽이 원래 통신이 좋다는 등 둘러대는 것 좀 보세요. 유치 찬란해서 차마 들어주기조차 민망하네요. 아니, 경제 살린다면서 왜 땅굴로 기어 들어갑니까? 무슨 설치류 월동 경제 하자는 겁니까? 이건 대한민국 국격에 관련한 문제입니다.

녹색평론에 표지로, 삽화로 이름이 많이 등장했던 손문상씨.
이번 녹색평론에 블로그 주소가 올라 찾아가보았다.

한 번 들러보시길.
사람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림과 사진이 가득.

http://blog.naver.com/smoons99
  1. 은딕 2007.07.16 16:31 신고

    예상했겠지만. 저기 블로그 갔다가 울어버렸다;


[시대의 흐름에 서서]큰 생각, 작은 생각, 인간성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정치는 사회가 하나의 체제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인가, 사회주의인가, 또는 공산주의 체제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이 정치 전체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도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정책으로 크고 작은 일체의 것들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 의료 또는 사회 복지 제도는 물론 경제, 사회, 외교 등의 정책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체제적 발상에 위험과 착각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구소련이 보여주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체제적 사고와 정책의 실패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삶을 생각하는 데에는 체제적 전제는 불가피하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정책들이 논의되고 대통령 선거에서 정책이 주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된다.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회가 하나의 체제라고 할 때, 정책은 체제를 움직이는 데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기준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일의 바른 추진을 위하여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이다. 또 그것은 현실 자원의 제한 속에서 여러 정책들로 하여금 상호모순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에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겠다는 잡다한 단편적인 정책들이 가장 큰 득표 효과를 갖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일관성은 사회적 삶의 근본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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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경향신문 7월 5일자
[시네마레터] 사실은 단하나 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이동진 닷컴 2007-03-12 19:39]

(저는 ‘이동진의 시네마레터’라는 칼럼을 10년 넘게 써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상황에서, 예전에 썼던 수백편의 시네마레터들 중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컸던 글 다섯 편을 이곳에 올립니다. 새로 쓰게 될 시네마레터 칼럼은 앞으로 계속 이곳에 실릴 예정입니다.)

중세 독일의 전설에 이런 게 있지요. 독일 바덴 지방의 어느 젊은 백작이 덴마크를 여행하다가 아름다운 성의 정원에서 오라뮨데 백작 부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합니다. 그는 그 성에 머물면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과 살아가던 오라뮨데 백작 부인과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왔을 때 그는 “네 개의 눈이 있는 한 당신을 바덴으로 데려갈 수 없다오. 네 개의 눈이 사라지면 반드시 당신을 데리러 오겠소”라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네 개의 눈이란 자신의 부모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반대할 줄 알았던 부모로부터 수개월 뒤 의외로 쉽게 허락을 받자 기쁨에 들떠 덴마크로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오라뮨데 백작 부인이 아이들을 살해한 뒤 죄의식에 몸져 누운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백작 부인은 ‘네 개의 눈’이 새로운 사랑에 방해가 되는 자신의 아이들인 걸로 오해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거지요. 자초지종을 알게 된 독일 백작은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망칩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백작 부인의 그 처참한 사랑으로부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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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sun 2007.04.18 11:31 신고

    사람이 무모해질 때, 무서운 것 같아.

레바논에서 돌아오지 않는 편지
오수연 | 소설가
그는 콜라만 마셨고 닭튀김은 손도 안 댔다. 한국에서는 가축을 죽이기 전에 이슬람 의식을 치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육류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욱 경건해진 듯했다. 2003년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의 현지 파트너였던 그는 무척 어렵게 비자를 받아 우리나라에 잠시 다니러 왔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요즘 행복해. 열시간에 한시간씩만 들어오던 전기가 요즘은 일곱시간마다 들어오거든. 그 한시간도 십분마다 이삼분씩 끊기지만. 수돗물이 언제 나올지는 기약이 없지. 미국이 3년 동안 이라크에서 한 일이 이거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고? 살아야 하니까."

그의 친척 몇명은 팔루자에서 죽었고, 처갓집 식구 한명은 아부 그레이브 근처에서 미군 탱크에 받쳐 죽었고, 친구 둘은 바그다드의 알 후리야라는 그의 동네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죽었고, 또 한명은 시내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와줘서 고맙고, 또 너무나 미안했다. 평생 술 한방울 마셔본 적 없다는 그에게, 내가 취해도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너그럽게 웃으면서, 자기가 한국까지 와서 술을 안 마신다고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반대로 부탁했다. 창밖에서 조용히 비가 내렸다.

"왜냐고? 그들에게는 주기적으로 전쟁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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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와 군대사회의 충돌, 이제 정치는 없다

우석훈





시민사회(civil society)라는 표현이 우리 말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번역되는 말은 아니다. 90년대 초반에는 이 말을 ‘민간인’이라고 번역한 적이 있기도 하지만 시민운동이 자리를 잡으면서 대체적으로 시민사회라고 표현하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뉘앙스를 살리기가 쉽지는 않다. 시민사회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군대사회 혹은 군계통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어쨌든 military society를 번역한 말이다. 민간인과 군대의 충돌이라면 너무 우악스럽고, 시민권과 군부 사이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나오는 일들을 일컫는다.

시민사회와 군부의 갈등에 관한 첫 번째 사례에서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라파이에트와 최초의 파리 시장이었던 당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혁명 후 시민들은 당똥을 중심으로 그리고 왕족의 군대는 젊은 장교 라파이에트가 지휘하게 되었는데, 후에 라파이에트가 배신을 하면서 프러시아 군대와 시민군이 직접 맞붙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이유’가 바로 이 때 시민군이 불렀던 노래이다. 시민사회와 군부가 가장 상징적으로 충돌한 사건이 바로 드레퓌스 사건이다. 군인 한 명 한 명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에서 군대사회가 가지고 있던 자신들의 판단과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한 간첩으로 지명된 젊은 장교 사건에서 폭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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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 밥벌이를 하는 입장에서 글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요즘 부쩍 글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매일 두세 개씩 써야 하는 기사도 부담스럽지만 내 생각을 담아내야 하는 글의 경우에는 쓰기가 더 힘들다. 내용을 채우는 것도 쉽지 않고 대개는 사정이 그러다보면 문장까지 꼬이기 십상이다. 말 하고 싶은 게 분명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풍부하면 글도 쉽게 써지는 반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모호한 데다 쓸 거리까지 빈곤하다보면 내가 봐도 참 한심한 허리멍텅한 글이 된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게 분명하다고 해서 또 채울 내용이 풍부하다고 해서 바로 훌륭한 글이 나오는 게 아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머리에 든 게 많은 사람인데도 도무지 글은 해독 불가능한 경우가 꽤 많지 않은가? 한편으로는 사실 내용이 빈곤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부럽게도) 말이나 잡념을 글로 옮기면 그럴 듯한 글이 되는 사람도 많다. 글 재주는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일까?

(한번 예를 들어 볼까.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혹은 있었던) 지식인 심 아무개와 윤 아무개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둘다 한 때 알튀세르에 강하게 경도됐다는 특징이 있다. 나 역시 수년간 이들의 심오한 사고를 이해해 보려고 부단히 애를 쓴 적이 있었지만 항상 난해한 문장 때문에 좌절하곤 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최근 꽤 많이 읽히는 소설을 쓴 박 아무개와 정 아무개를 들고 싶다. 이 둘도 공통점이 있다. 평단의 꽤 호의적인 평가를 등에 엎은 데 이어, 기이하게도 보통 평단의 평가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20~30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 이제 소설이 꽤 이름이 알려진 덕에 여러 일간지에서도 이들의 칼럼을 볼 수 있다. 글쎄, 그 시간에 책이나 더 읽는 게 두 사람의 발전을 위해서 더 낫지 않을까? 하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책 읽지 않는 20~30대들과 교감하는 데는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고백하자면 나 역시 10대 때부터 글쓰기에 어느 정도 컴플렉스가 있었다. 특히 대학에 들어와서 글 잘 쓰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더욱더 글쓰기에 대해서 자신감을 잃었던 것 같다. 용을 쓰면서 따라가보려해도 누구에게나 쉽게 읽힐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의 글을 빚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글을 팔아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혹시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아마 이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평범하고 글 재주가 없는 녀석도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글 재주가 있는 이들이여 좌절하지 말라.'

그런데 최근 우연찮게 많은 팬들을 끌고 다니는 '인터넷' 글쓰기의 달인 두 사람에게서 글쓰기에 대한 고백을 들었다. 한 사람은 김규항이다. 최근 김규항은 그의 블로그에 「문장론」이라는 글을 통해 나름의 글쓰기 철학을 밝혔다. 그 중 한 대목을 읽어보자.

"……내가 쓰는 글의 8.5할쯤에 해당하는, 공을 들여 쓰는 글은 초고를 쓰면 적어도 서너 번 이상은 퇴고를 한다. 군더더기라 느껴지는 건 망설임 없이 없애거나 좀 더 간결한 표현으로 바꾼다. 나는 중언부언 하는 것만 군더더기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화려한 표현도 군더더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러 반복 효과를 내려는 게 아니라면 같은 글에선 같은 단어를 쓰지 않는다. 10매 이하 칼럼에선 반드시, 30매가 넘어가는 긴 글에선 되도록 그렇게 한다. 동시에 리듬을 만들어간다. 거창하게 말해서 운율을 맞추는 건데, 눈으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리듬감이 흐트러지거나 호흡이 끊기는 부분은 글자 수를 고치거나 단어를 바꾼다.……간결함과 리듬 말고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쉽게 쓰는 것이다. 나는 왜 거의 모든 글쟁이들이 글은 쉬우면 쉬울수록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먹는 어려운 말을 이유 없이 쓰지 않는 건 물론이려니와 되도록 한자말을 줄이려고 애쓴다……."

인용한 부분을 읽고 나서 낯이 뜨겁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 끄적이는 이 글조차도 김규항의 기준에서 보면 얼마나 부끄러운 글인가. 김규항과 같은 타고난 글쟁이도 서너 번 퇴고를 한다는데 솔직히 나는 (빠른 시간 안에 글을 써내야 하는 직업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

다른 한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의 고백은 좀 우연찮은 기회로 들었다. 어제 <프레시안> 일로 그와 잠시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대화가 오가다 나온 그의 고백.

"내가 요즘 방송을 진행하고 있잖아요. 방송을 위해서 짧은 칼럼이긴 하지만 1주일에 글을 여섯 개나 쓰고 있어요. 거기에 덧붙여 《씨네21》 글까지 써야 하니, 하주 힘들어요. 도무지 글감이 떨어져서 글쓰기가 힘들어요. 갈수록 글의 질도 떨어지는 것 같고."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고백은 글쓰기에 대한 상식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세상사 모든 것이 그렇듯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생각을 벼르고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문장을 갈고 닦아야 한다. 여기에 잘 읽히는 글이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이다. 김규항은 이 역시 잘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요즘 내가 글쓰기가 더욱더 힘들어지는 것은 또 글쟁이들이 세월이 지날수록 글쓰기에 자신감을 상실하는 것은 바로 글 재주에 비례해서 현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 모르겠다.

"내 삶과 내 글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순환한다. 내 삶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나라는 인간을 더 낫게 만들지 않는다면 내 글은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내가 문장을 다듬는 일은 내 삶을 다듬는 일과 같다."

by tyio | 2005-08-20 23:25

임종을 앞두고 내가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좀 더 사무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건데."
"빌어먹을. 단 한번도 통장에 충분한 돈을 채워보지 못하고 인생을 마치는구나....."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 날에 내가 생각할 일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리라.

나는 얼마나 많이 사랑하며 한 평생을 살았는가
어떻게 이웃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가
누가 나를 사랑했는가
나는 누구를 소중하게 여겼는가
과연 내 인생은 다른 사람에 견주어 어떻게 특이한 것이었던가
나는 어떻게 세상을 섬기며 살았는가
어떻게 인생을 사랑으로 채우며 살아왔는가
[서울신문]전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홉스나 루소와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은 개인들의 자유의 일부를 군주에게 양보하면서 전쟁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을 유지하고 있는 것보다는 리바이어던에게 조세를 제공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계약론의 본질인 셈이다. 이들보다 100년 후에 등장한 애덤 스미스와 다시 100년 후인 데이비드 리카도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거래인 무역이 전쟁을 없애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인 것 같다. 포도주의 대명사인 보르도를 영국이 만드는 바보 같은 일을 하는 것보다는 면화로 더 좋은 섬유를 만들어서 교환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것이 국부론의 주장이고, 이 당시의 경제학자들은 국가 간에 무역을 하게 되면 전쟁이 줄게 될 것이라는 행복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16∼17세기에 자본주의를 지지한 학자들의 말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어쨌든 시장 사회와 자유무역을 추진하면 결과적으로 세상의 전쟁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가장 꽃피었던 20세기에 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점을 상기하면 좀 이상해 보기이기는 하지만, 유럽사에서 전쟁일수가 가장 적었던 시기가 사실은 20세기였다는 점을 환기할 때 아주 틀리다고는 하기 어렵다. 실제로 유럽에서의 자본주의는 15세기에 세계를 지배하던 해적들과의 전쟁과정에서 승리한 시스템이기는 하다.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했던 국가인 스페인의 재경장관이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훨씬 빠르게 부를 축적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발언들을 근거로 유럽 사학자들은 때때로 15세기의 해적들에 대해서 스페인의 여왕이 비밀리에 지원을 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함대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순 사건을 ‘신사’들의 자본주의가 드디어 해적들의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비로소 자신의 길을 세운 순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는 번영이라는 한 가지의 목표와 평화라는 또다른 목표를 일종의 이중 플롯처럼 구성하면서 지금까지 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한테 만약 잘 사는 사회와 재미있는 사회 그리고 전쟁 없는 사회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전쟁 없는 사회를 고를 것 같다. 좀 가난하거나 좀 재미 없더라도 전쟁이 없다면 그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작은 기여라도 하면서 살고 싶다. 냉전이 끝난 지금 과연 전 세계에서 전쟁이 앞으로 20년 내에 발발하지 않을 곳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해보자. 누구나 스위스를 고를 것이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와 독일 같은 곳을 고를 것이고, 미국이나 중국 혹은 일본이 앞으로 20년 후에도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고를 사람은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다.
로마클럽 보고서의 연구팀장인 도넬라 메도 여사는 2년 전에 타계하면서 20년 후에 전 세계적인 자원전쟁이 발발할 위험성이 높다고 경고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과연 어떨까?

현재와 같이 세계 10위의 경제규모에서 외국 자원의 의존도를 계속 늘려나가는 상황인 만큼 우리도 해외주둔군을 가지지 않을 도리는 없다. 한국 또한 수비형인 이지스함만이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인 공격을 할 수 있는 원양작전 능력을 갖춘 항공모함이 절실히 필요하게 된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시장인 중국과 일본이 이웃한 동북아 경제의 팽창은 자원경쟁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20년 후에도 이 땅에 전쟁이 없을까? 가장 간단한 시뮬레이션 모델로도 빠르면 10년, 길면 20년 후에 한국도 사활을 건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해준다. 우리한테 평화의 조건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한반도에 20년 후에도 전쟁이 없게 할 수 있는 평화의 조건이 달성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무척 궁금한데, 대한민국 학계나 그 어느 곳에도 여기에 대한 답은 별로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내 눈에는 한국은 열심히 전쟁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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