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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by bravoey 2012. 6. 11.

 

오랫만에 장석남 시를 읽었다. 대학교 때 헌책방에서 우연히 읽은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이후로 처음이다. 그 때 그의 시는 겨울잎에 달린 눈물 같았다.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시집은 뭐랄까, 이 사람 나이들었구만, 이런 생각이 들어 쉽사리 가슴에 닿지 않았었다. 그래서 놓다 읽다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에 마음에 들어선, 이 시,

 

그 물가에 갈 수 없으므로

그 물가를 생각한다

그 물가에 선 생각을 하고

그 물가의 풍경을 생각한다

물소리를 생각한다

그리움 따위는 분명 아니고 기운 떨어지면 찾아오는

향수 같은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깊은, 그 보다는 더 해맑은 것이

나를 데려간다

 

- 해변의 자화상 중에서

 

덕분에 오랫만에 아주 빛 바랜 추억 하나를 꺼내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차근차근 그의 시를 읽어나갔다. 그의 시는 아직 겨울잎에 달린 눈물 같았다. 그 것을 잊은 건 나였던 것 같다. 시 속에 숨은 그 눈물을 하나하나 떨궈내며 나도 오랫동안 잊었던 마음의 조각을 하나 꺼내 오늘에 붙여보았다. 시 하나에 추억이 방울방울. 아직 삶은 그리 무겁지 않은 것이다. 아직 삶은 물에 잠기지 않은 것이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추억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인 것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솎아내고 헤쳐서 그 돌멩이를 바라본다

 

나는 나를 반나마 허물어서 그 돌멩이를 바라본다

 

- 담장 중에서